업히고 싶은 밤
업히고 싶은 밤
  • 신금자
  • 승인 2007.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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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금자[수필가 · 독서신문 편집위원]




 어디론가 편지라도 써야할 봄밤이다.
대지는 온밤을 지켜서 먼동이 틀 무렵에야 잠이 든다. 봄이 되면 사람들이 나른하고 졸리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아무렴, 지구촌 구석구석 산고로 뒤척이는데 미련하게 잠을 잘 수도 없다. 우리 몸은 신진대사에 예민하다. 자연은 저리 되돌아와 베푸는데 나는 나누어줄 향이 없어 여기저기 아프기만 하다. 지표의 리듬을 따라 움직여야 건강하게 숨을 쉴 수 있다. 특히 흙의 감촉은 신체에 그대로 전해진다. 아직은 거친 흙바람이 불고 그 바람을 애써 감춘 봄밤은 그리움을 부르는 모양이다. 엊그제 그 친구도 그랬을까? 
 

   “니는 나가(내가) 안 보고 싶나?”
   “.......”
 늦은 밤 수화기 너머 그 친구의 목소리는 굄성이 보태져서 촉촉했다. 오래도록 못 봐서 쌓인 애증이기도 해서 딱히 내 놓을 말이 없었다. 길이 멀어 고향을 자주 찾지는 못한다. 혹 일이 생겨 가더라도 볼 일을 보고 휑하니 오기 바빴던 탓에 고향을 지키고 사는 동무를 찾아볼 짬을 내지 않은 잘못이 오롯이 내게 있었다. 속어림으로 전화통 저편이편에서 둘만 아는 어릴 때의 기억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냅다 기억나느냐고 나를 다그쳤다. 생각이 나다마다.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도 많아 더러 잊기도 하였지만 여러 정황들은 그대로 되살아났다.

무지렁이 초교 시절, 함께 학교에 가기 위해 그 친구의 집에 가면 그 때까지도 친구는 마루에서 엄마 젖을 물고 있었다. 젖을 먹는 것이라기보다 막내의 어리광이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많이 나지도 않는 젖을 물고 장난치며 만지작거려도 타내지 않으시더니 몇 년 후 졸지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식사 중에 급히 체한 것이었는데 응급처치라도 제때에 했더라면 하는 애석함에 가슴이 검쓰다. 친구의 집이 동리 맨 꼭대기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친구는 골목길을 한달음에 달려서 내게 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 금자야, 울옴마가... 울옴마가... 엉엉......”
   “.........”
 퍼뜩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눈물범벅이 된 친구를, 아니 언니도 아버지도 아닌 나에게 이 어마어마한 사실을 제일 먼저 안기다니 말문이 막혔다. 나는  친구의 손을 꽉 붙들고 친구네로 무작정 뛰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아무런 의식이 없고 멍하다. 때로 그 친구랑 다투기도 하였지만 그림자처럼 늘 붙어 다녔다. 농삿일에 내몰린 부모는 우리를 놓아서 절로 키웠다. 그래서 유년으로 갈수록 친구란 존재가 끈끈한 내적 연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겅중겅중 건너 뛴 내 유년은 밋밋하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뙤약볕에 십 리길을 걷자니 둘 다 지쳐서 꾀를 낸다는 것이 저만치씩 서로 업어주기를 하였던 지난날이 봄날 수선화의 구근처럼 드러났다. 수선화의 구근은 언제나 미덥다. 그 속에 기다림이 있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꽃대를 올리는 구근을 보며 기다림을 배웠다. 장에 간 어머니를 기다리고, 외가에 간 친구를 기다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또 동백꽃이 피고, 참꽃이 피고, 감꽃 피기를 기다렸다. 더러 구근이 변함없이 묻혀 있으리란 생각에 소홀하기도 했다.

 마음이 허우룩할 때는 말없이 구근을 파 본다. 겹겹 안으로 담아둔 가깝고도 먼 그리움이다. 내 친구도 봄날 수선화처럼 애잔하다. 늘 그 자리에 머문듯하나 고향과 계절을 거스르지 않고 가식없이 살아간다.

 돌담 삽짝에 수선화가 피는 계절이다. 수선화의 구근에서 옛 친구를 느끼던 나는 밤새 업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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