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충남 홍성군 편
문학기행/충남 홍성군 편
  • 이재인
  • 승인 2007.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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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 애와 효제의 대표적인 고장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나룻배와 行人/한용운


▲ 만해체험관 전경

시인으로서 승려였고 애국자였던 한용운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거나 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충남 홍성군 하면 먼저 만해 한용운을 떠올린다.
만해는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이미 교과서에 기록되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거기에다 만해는 애국자요, 승려로서 이기심을 버린 종교인이다.
그는 3?1운동 때에 불교계 대표자로서 민족을 대표하는 33인으로 참여했다.
<공약 3장>을 기초하였고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하는 등 민족 운동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던 아주 훌륭한 선각자이다.
그는 오서산, 용봉산, 봉수산, 초롱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인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사방의 명산대천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고 이곳의 아름다운 산천과 맑은 기상이 오늘의 만해로 살아있게끔 했던 것이다.
예부터 인심이 순후하여 너그럽고 남을 섬길 줄 아는 그는 1879년(고종 16년) 8월 29일, 옛 마을 이름이 박철동 잠방굴이라는 곳에서 출생했다.
청주 한씨로 서원군 한명보의 후손인 아버지 한응준과 모친 온양 방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용운 선생의 어릴 때 아명은 유천(裕天)이고 본명이 정옥(貞玉)이다.
불명(佛名)이 용운(龍雲), 법호(法號)가 만해(卍海)라 불렸다.
불과 여섯 살이 되자 만해는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漢學)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만해는 나이 9세에 문리에 통달하여 마을의 어른들로부터 신동이라 칭찬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을 하고 설악산 백담사의 승려로 입산하게 된다. 그가 입산하게 된 동기는 이 글과는 관련이 없어 생략하기로 한다.
백담사에서도 그는 불문에 입도하여 명승강사로 종단에 이름이 자자했다고 전한다.
1910년 일본이 추진했던 한?일 불교 동맹을 반대, 철폐운동을 벌였으며 33세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해는 거기에서도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지사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진로 등을 모색했다.
그리고 최린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일 것을 결의한 것이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진 발단이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만해는 3?1운동 전후에 걸쳐 만년기에 이르기까지 <불교대전> <불교유신론> <님의 침묵>등의 저작 발간에 힘을 기울였다.
만해는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 등 삼대사상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만해는 애국지사로, 불교계의 지도자로, 탁월한 문학가로써 행적을 남기고 1944년 6월 29일(음력 5월9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심우장을 지을 때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지금 결성면 성곡리 한용운 생가지는 1991년도에, 사당은 1994년에, 체험관은 최근에 홍성군에서 우람하게 신축했다.
실상 만해를 기리는 기념관은 생가 이외에도 두 군데나 있다. 그 한곳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내 <만해기념관>이다. 생각밖에 꽤 많은 유물이 수장 전시되었는데 이는 전보삼 신구대학 교수에 의해 1990년도에 남한산성에 신축, 개관되었다.
이 기념관은 대지 500평 연건평 120평에 지상 2층 규모로 만해정신인 민족자존의 역사와 호국정신의 성지로, 기획전시실, 교육관 자료관을 구비하고 있다.
그리고 백담사에 <만해마을>이 있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위치한 만해박물관이 그곳이다. 만해의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화 예술 사업으로 만해축전, 토요문학아카데미, 문인창작 집필실, 통일문학교실 등의 만해 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만해가 떠난 지 60여년이 훨씬 지났건만 그의 정신은 홍성군과 여러 곳에 영세불망의 넋으로 길이 보전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간 만해의 생가는 구황을 통하여 29번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생가를 찾는데 고생이 많았다.
길을 잘못들은 탓인지 표지판이 없어 필자는 논둑길로 밭둑길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았던 일인데 홍성인터체인지 출구에서 서산, 태안방향으로 5백 미터만 가서 좌회전을 하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길을 뺑뺑 돌아 한 시간 가량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하긴 한국 근대사 인물가운데 큰 산인 만해를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이정도 고생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일찍이 시인 조동탁은 「시인연구」에서 만해를 가리켜 혁명가와 선승과 혁명가로서의 정삼각형의 형태로 남다른 전범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삼각형의 면을 보지 않고서는 만해의 진면목은 체득되지 않는다고 했다.
종교인으로서의 만해
만해의 사상은 실천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깊은 직관력과 더불어 독서로 읽힌 정신세계는 실천으로 더욱 빛난다.
3?1운동을 선두에서 주동한 일, 그리고 일경에 의한 투옥, 신간회의 참여 등은 만해의 치열한 삶의 역정을 대변해 준다. 만해의 나이 17세에 동학운동에 참여했다.
만해의 아버지와 큰형, 그리고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것은 후대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실천적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전범이 되기도 한다.
만해는 동학혁명과 의병운동이 모두 실패로 끝나자 고국을 떠나 노령의 블리디보스톡 등지를 유람하다가 귀향하여 불교에 입문한 것으로 보인다.
만해에게는 당시에 있어 종교란 안식과 구원이나 혹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참여의 적극적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실의 안주가 아니라 현실을 극복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의지가 명확했다.
승려로서 또한 불교의 근대화와 혁신을 주장했던 그의 사상은 바로 1910년 백담사에서 저술된 「조선불교 유신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화, 한국의 자주성은 흔히 춘원이나 육당만이 독점한 것처럼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만해의 실천사상과 조국의 혁신을 꿈꾸는 열정은 어느 독립운동가나 선각자에 못지않다.
이러한 정신을 계몽하고 또한 선양하기 위해 홍성군이 만해체험관을 건립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로 보인다.
만해 그의 불교와 조국과 민족을 하나로 묶는 삼각형의 철학은 아직도 연구의 대상으로 보인다.
물질문명이 판을 치는 세상, 디지털만이 세상이 최고라고 부르짖는 세태에 만해는 우리의 스승이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중에서
 
우리는 님을 결코 보내지 않았다. 만해는 오늘도 우리의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길이 있다. 그것은 나를 버리는 길이다.
님을 위하여, 당신을 위하여, 절대자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나를 버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만해를 통해 새삼 깨달았다.

▲ 김좌진장군의 생가터, 만해 생가, 청주이씨 사당인 화신사(좌로부터)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에서
김좌진 장군의 생애는 그를 모델로 하는 드라마나 필자의 장편소설 『일어서는 풀』 『북풍』등을 통해 세상에 어느 정도 알려졌다.
그의 기념관이나 그의 업적보다는 그의 얼을 되살려 교육현자에서 접목시키는 학교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곳이 바로 홍성 갈산 중고등학교이다.
교장 이병학 선생은 지난해까지 예산교육장으로 예산교육의 요람인 『예산교육사』를 발간했다. 그의 열정과 불타는 의욕이 예산교육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의 이 같은 업적 때문에 이제 홍성의 갈산교육에 보탬이 되라고 충남교육감으로부터 지난 3월 2일자로 명령받은 이병학 교장을 찾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작고 아담한 학교에서 이교장은 ‘건강한 학교, 화목한 교정 속의 친화’를 모토로 삼아 김좌진장군의 얼과 정신을 학생들에게 계승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더욱이 이 갈산중학교 터전이 김좌진장군 생가터 이므로 더욱 의의 있는 교육이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교장은 전교생과 교사들이 사제동행으로 기념관 참배, 주변청소, 얼 계승을 위한 계획으로 추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청주이씨 세거지에서
홍성군 홍동면 청주 이씨는 정승과 정승으로 이어진 맥이 있고 충절과 효애로써 이름 높은 가문이다.
특히 이를 대변하는 화신리의 화신사(花新祠)가 존재하고 있다.
이 화신사에는 청주이씨 시조 태사공 이능희, 2세 어사 겸의, 6세 문정공 이공승, 8세 상장군 이장, 9세 밀직사 이창우 등 10세를 영모, 숭상하는 사당이 있다.
이러한 사당에서 뿐만 아니라 효학리 효동의 효자문, 효행비를 통해서도 청주이씨가 훌륭한 가문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청주이씨는 대대손손 청렴과 청백리로 이름이 알려졌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청허당 이거이가, 8세손 처사공 이종승이 청백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거이는 조선 최고의 벼슬, 영상에 올랐다. 청주이씨 중흥의 인물이다. 그의 청렴과 검소는 바로 문정공 이공승의 피를 이은 것이다.
이거이는 태조 6년에 평안도절제사를 거쳐 정사공신이 되어 전병을 맡았다. 태종 1년에 좌명공신이 되어 서원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거이는 대간의 탄핵으로 아들 이저와 함께 충북 진천 땅에 은거하였다. 그 후 다시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거이는 노년에 하륜과 함께 『경제대전』을 편찬하였다. 양촌 권근, 송당 조준이 충효겸전한 인물로 추존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당쟁이 심해지자 이에 염증을 느껴 뿔뿔이 헤어져 충남 홍성으로 스며든 이씨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이들은 이거이, 이공승을 비롯한 영모각을 세우고 충효 효제 애를 기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청주이씨 가운데 출세한 분들이 적지 않다. 해군 소장 이철희, 검찰총장 이태희, 예산 교육장을 역임한 이병학, 그리고 동아제약 사장이 청주이씨 계열의 대표자들이다.

▲ 이재인(인장박물관장·경기대 국문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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