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의 『햇살 고운 날』에 수록된 ‘겨울 나그네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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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한 자태의 흰 눈이 내릴 때마다 가슴 아린 추억에 눈가가 젖는다. 한 때는 사랑이 내 생(生)의 전부인 적이 있었다. 그땐 별표전축,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그리고 그 머슴애만 있으면 더 이상 소망이 없노라고 장담했었다.
허나 하늘이 회색빛으로 낮게 내려앉은 어느 겨울날 그 머슴앤 쓸쓸한 표정으로 “네가 그리울 땐 편지를 쓸게” 이 말 한마딜 남기고 훌쩍 외국 이민 길에 올랐다. 그 후 내 망막에 회색빛 하늘이 비춰질 때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중 ‘얼어붙은 눈물’을 입 속으로 나직이 따라 부르곤 하였다.
‘놓친 물고기가 더 커 보인다’라는 생각 때문일까. 이렇게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는 그리움에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이 나이에 웬 사랑 타령일까. 이젠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라는 릴케의 시어를 음미할 나이에 이르렀잖은가.
하지만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엔 혼자 일 수가 없었다. 동병상련의 주옥같은 글이 내 가슴에 젖어들어서인가. 수필가 박영자 씨의 『햇살 고운 날』이란 수필집을 손에 들고 나는 아름다운 필력에 매료되고 사랑의 아픔에 공감이 돼 그 책을 단숨에 읽고 말았다.
이 책의 저자인 박영자 님은 그의 저서 『햇살 고운 날』에 수록된 ‘겨울 나그네와 인연’이라는 작품에서 젊은 날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추억과 지금의 부군을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을 잔잔한 문체로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지난날 한창 월남전이 치열 할 때 한 남자를 월남전에 보내고 혼자 마음 아파했다는 필자, 전쟁터에 목숨을 맡긴 사랑하는 사람, 사지(死地)에 님을 보낸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사랑 한다’는 말조차 변변히 주고받지 못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막상 전쟁터로 그 남자를 보낸 후, 향한 그리움이 사랑인 것을 확인 했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남자를 가슴에 꽃처럼 매단 채 그 꽃에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가꾸던 필자였으리라. 그러나 인연은 엉뚱한데서 맺어지고 말았다. 같은 학교 동료인 어느 여교사가 전에 선을 본 남자와 우연히 마을 다리에서 스친다. 오버 깃을 세우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마주 오는 남자를 본 순간 그가 왠지 ‘겨울 나그네’같이 쓸쓸해 보였음은 옛사랑의 그림자가 필자의 가슴 속에 깊게 드리워져서 일까. 아님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연민이었을까. 아마도 그 남자가 복수 초에 내려앉는 흰 나비 같은 존재였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훗날 필자는 그 ‘겨울 나그네’같았던 남자와 결혼을 하였으니 남녀의 인연이란 역시 억지로는 아니 되는 법, 보이지 않는 숙명도 적잖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분의 수필을 읽고 옛사랑이 불현듯 그리워 밖을 나섰다. 지상으로 낮게 몸을 뉘이던 흰 나비 떼들이 내 안으로 날아와 그리움으로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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