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괴산·청원군 편
문학기행/괴산·청원군 편
  • 이재인
  • 승인 2007.02.22 11: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연은 말이 없고 청풍명월 속에 사람의 인적은 살아 있네

▲     © 독서신문
크고 작은 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것을 우리는 숲이라 일컫는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이리라. 사람이 자라서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면 그 마을과 생가는 빛이 난다. 빛나는 인간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곳을 ‘인간의 숲’이라는 은유로 표현하곤 한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이라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보한재 신숙주(1417~1475)라는 인물이다. 신숙주는 조선시대의 학자로서 집현전 부수찬을 지낸 인물이다.

1443년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시명(詩名)을 떨치고, 귀국도중 쓰시마(대마도)에 들려 계해약조를 체결했다.

그 후 집현전의 학자로서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을 찾아가 음운(音韻)에 관한 지식을 듣고 와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우의정에 올라 승진하고, 1460년 함길도 도체관찰사, 그리고 다시 영의정을 역임했다.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써 6대 왕을 섬겼다. 다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한 점에 대해서는 후세에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신숙주와 같은 고령신씨 집성촌이 바로 낭성면 일대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한 인간으로서 걷지 말아야 할 길도 있다. 이를 지나게 되면 후대에 지탄이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준엄하다. 치욕스런 삶으로 낙인찍힐 때의 그의 공적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속세의 논리이다.



이 신숙주와 같은 뿌리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이 태어났다면 사람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만하다. 단재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남 대덕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1887년, 본향인 충북 낭성군 귀래리로 이사를 왔다. 이곳에서 수학하고 성장했다.

애국자로서, 언론인으로 일제하에 맞서 치열한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니 일본 경찰이 신채호를 그냥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이를 눈치 챈 단재는 안창호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러한 사상과 민족정신은 망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911년 구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신문」의 주필로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옛 고구려 땅을 답사 기행하면서 대고구려주의적인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15년에 그 유명한 「조선상고사」를 집필했다. 1916년에는 소설 「꿈․하늘」을 집필하여 문학으로서 천부적 재질을 드러내기도 했다. 1922년 「의열단」의 행동강령인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925년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다물단」의 선언문을 기초하기도 했다.

단재 신채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선고형을 받고 1936년 2월 21일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러한 애국자로서, 언론인으로서, 그리고 소설가로서, 역사학자로서의 그 책임과 사명을 다했다.

비록 그가 성장하고 거기에 의로운 몸을 뉘였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자랐던 집터에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이 덩그렇게 역사를 일깨우고 있었다.

100년 만에 겨울 눈 가뭄 속에서도 기념관 앞산에는 엊그제 내린 잔설이 희뜩희뜩이 선생의 인격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싶어 눈시울이 뜨거웠다. 못난 후학으로서 나라와 민족 정체성마저 훼절되어가는 오늘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침묵하는 자신을 되뇌며 나는 말없이 차창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같이 동행한 작가는 내 행동에 따라 같이 얼굴을 붉혀 주었다. 일심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하나회는 정치치적으로 도려냈지만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젊은이는 씨가 마르지 않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상당산성 기슭을 뒤로 피어오르는 햇빛은 벌써 봄을 안고 오는 것 같았다. 여기 상당산성을 넘어서면 서로 좋은 글을 쓰려는 신채호 선생의 후손들이 여럿 모여 살고 있다. 그리고 살았던 분의 정기도 감돌고 있다.

어림짐작으로 그 이름난 인물들…….

신동문 우 영 임찬순 이상훈 윤지용 강우진 강준형 반인섭 조무주 이현숙 신인찬 조철호 조성호 김효동 한 호 김혜식…….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문인들도 있다.

그러나 청주의 물은 이곳 낭성으로 흐르지 않고 무심천으로, 그리고 미호천을 돌아 금강으로 간다.

낭성에서 흐른 물은 괴산의 괴강, 벽초 홍명희 생가를 휘돌다 남한강으로 그리고 여강을 경우, 양수리에서 북한강을 만난다. 그 합수된 물이 1천만 서울과 기호지방 사람들의 목을 축인다. 그게 바로 한강이다.

이 기적의 한강에서 턱을 고이고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앉아 구국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3.8선을 지켜주세요’라고….






벽초의 생가를 찾아서

필자는 소설을 쓰는 작가요, 또한 현재 대학에서 소설을 연구하고 그 소설의 문학성과 대중성을 평가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 벽초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 같은 것이 내면에 흐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었다. 그때 시를 쓰면서 시를 가르치는 m대학의 l형과 함께 괴산 인산리의 벽초 생가를 찾았던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벽초의 삶과 문학을 상상하면서 돌아왔다.

그 돌아서는 필자의 발길은 아쉽고 무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로서는 월북 작가의 작품이 해금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 벽초의 높고 깊은 문학적 지평과 그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는 계기가 아니었다. 그것이 발길을 무겁게 했던 첫 번째 이유이다.

둘째로 남북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이념 문제로 인하여 월북 작가 벽초가 안고 있는 작품세계를 자유로이 논의할 수 있는 마당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세 번째의 아쉬움은 그 흔한 벽초의 「문학기념관」같은 공간이 없었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가 쓰던 잉크병, 펜대, 혹은 벼루 등 문방사우라도 우리의 시선을 충족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당시의 사회적 현상에 비추어 「연목구어」라 할 수 있으리라.

<반공법과 고무찬양>이란 죄목이 이를 연구하는 작가나 교수에게 걸림돌로 막아서고 있었다.

이번 문학기행은 수필가 향원이 운전을 했기에 길을 잘못 들어 세평리 경로당 앞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읍내에서 4km떨어진 위치라는 것 이외에는 정보가 전혀 없었다.

인산리에 250년이나 된 조선시대 벽초 고가를 묻는데 알고 있는 경로당의 촌로들이 거의 없었다. 하긴 그들의 의문어린 눈빛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내 자신도 충청도 사람이지만 이들은 낯선 이들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게 특징이다. 속으로는 경계의 벽인 이데올로기라는 위험성이 내재해 있었다.

벽초가 월북한 이래 그 후손 일가와 친척들의 괴로움이 필자는 가늠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나에게 용건과 내 직업을 물었다. 그런 경계 속에 무슨 정보를 얻기를 바랄 수 있는가?

그렇게 순진한 사람들을 충청도 방언으로 ‘쑥맥’이라고 한다. 겨우 물어물어 괴산군청 옆에 위치한 「일완 홍범식생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은 벽초의 아버지 홍범식의 생가였다. 순국열사 홍범식 고가는 한창 복원 중이었다. 70%쯤 완성 단계였으므로 집 안팎이 어수선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지만 아쉬운 대로 인산리 생가와 이곳 그의 아버지 일완 생가를 일별할 수가 있었다. 벽초는 19세기 말 1888년(고종 25년 무자년)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에서 태어났다고 모든 문학적 자료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풍산 홍 씨 족보」 풍산 홍 씨 대동보소(권지4, 1933, 123면)와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제3권, 한겨레신문사)(1992, 75면)에는 서울 종로구 계동 38번지에 본적을 두고 있는(종로구청 소장) 벽초의 생년월일이 1887년 5월 25일로 기재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이므로 강영주 교수가 이를 지적, 바로 잡았다고 하겠다.

홍명희의 호는 청년시대엔 가인(可人, 假人)으로 장년에는 벽초로, 혹은 욕우, 백옥석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19세기말,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련에 처해 있었다.

밖으로는 일본의 강압에 의한 개항과 개국이 있었고 안으로는 1882년 민씨 정권의 부정부패에 격분한 군인들의 폭동인 임오군란이 있었다. 이어 1884년 급진 개화파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 후유증 등은 당시 암울한 시대상이었다.

이에 간헐적으로 일어난 농민항쟁이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이를 빌미로 청․일 외세가 개입, 무력으로 국권을 농락한다. 결국 갑오개혁도 그 이념을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사회에 굳게 뿌리내린 봉건체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움직임들이 도처에서 감지되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개안이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시대적 과제와 당위성이 제기된 때였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