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하
행 하
  • 김혜식
  • 승인 2007.0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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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식 수필가     ©독서신문
 어떤 이는 인분보다 더럽다고 했다. 원수처럼 증오심도 키우는 이도 있다. 그것은 풍족하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부족하면 삶을 피폐시키는 양면성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무리 안간힘 써도 손아귀에 넣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힘들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고 멀리 하기엔 참으로 절절한 그리움을 나에게 안겨주기도 한다. 하여 영국의 시인 로버트 번즈조차 ‘인간 독립의 바위’라 하지 않았던가. 하긴 이로 인해 인간은 자유, 풍요, 복지를 누리곤 한다. 타인의 의존함을 없애고 자존심, 권력을 높여주기에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게 이것의 매력이기도하다.
 사람 가슴에 강한 소유욕을 불러일으켜 오죽하면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권리로  안전 및 압제에 저항케 하였을까.
 1789년 탄생한 인권선언 제 17조를 굳이 들추지 않아도 인간의 강한 집착과 철저한 소유욕을 유발시키는 마력이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참으로 하찮은 티끌 같은 존재이다. 어느 땐 길바닥에 그것을 흘리면 지나가던 개도 돌아보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주변을 살핀 후 희색이 만연한 채 재빠르게 챙기니 참으로 우린 개만도 못한 듯싶다.
 그래도 이정도면 그야말로 양반 측에 둘만하다. 위정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검은손으로 그것을 당연한 듯 슬쩍 탐내지 않는가. 주변의 눈치라도 본다면 그나마 겸양을 갖춘 자라 할 수 있다. 하긴 그들의 손바닥은 그 크기가 무한하다. 여태껏 손이 모자라 악취 풍기는 부패를 못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지중지 여기는 어린 막내 딸아이를 어른도 힘들다는 음식점에 일부러 아르바이트를 하게 했다. 그것에 대한 짝사랑을 미리 싹트게 하기 위함이었다면 어미로서 지나칠까.
 차라리 곁에 가까이 다가가 그 모습을 직접 피부로 확인하고 그 냄새라도 일찍이 맡게 되면 훗날 그것의 집착에서 쉽사리 벗어날지 모르잖는가.

 조선 시대 양반들은 불결하다 여겨 젓가락으로 집어 행하(行下)를 줬으니 역시 후대에 양반 소릴 들을 만도 하다. 19세기 말 양반들이 인력거를 타면 인력거꾼들에게 더러운 듯 긴 젓가락으로 집어서 행하(行下)를 건넸던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의식은 어느덧 우리들의 피 속에 녹아 심장까지 피돌이가 되어 음습한 가슴 속에서 독버섯처럼 그 키를 키웠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때 마음의 음지에서 자생한 그것은 깡그리 점멸되기 시작했다. 세상살이의 안전판이 무너지자, 절망과 실패가 온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아니, 삶의 뿌리가 온통 뽑힐 지경에 이르렀었다. 생존을 위해 더욱 필요성을 절감했다. 욕망에 솔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점에선 재테크에 대한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기도 했다. 물질만능 시대에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더 이상 젓가락으로 그것을 집어들 수는 없었다. 지난날의 그런 행위는 이미 ‘모순적인 연애’ 시절의 꿈같은 장밋빛 추억으로 돌려야 했다. 그것을 몹시 사랑하면서도 우린 그동안 피 속에 흐르는 양반 기질로 인해 드러내놓고 차마 애무하지 못했다. 그것과 더 많은 해후를 위해 마음으로만 기다렸고 간절히 염원했을 뿐이다. 그 덕분인지 어두운 곳에서만 몸집을 불리고 키를 키웠던 것이다.
 이젠 한국인의 그 이중적 태도가 돌변하였다. 비록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법을 아무도 가르치거나 그 문제를 토론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지만 이젠 안다.
 욕망에 솔직한 미국인들의 기부문화를 우리도 엿보게 된 것이다. ‘억만장자의 자선(billanthropy)’이란 신조어를 낳은 워런 버핏이나 자선에 전념하기 위해 은퇴 하겠다는 빌게이츠에게서 새삼 옛 행하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이다.
 부족함을 채우는 욕망이 아닌 자아와 인격을 채우는 일에 유용히 쓰인다면 더 이상의 젓가락으로 집던 더러움이 아닌 신성한 정재(淨財) 로 존재할 것이다.
 지상의 신(神)을 부리기 위해 하늘의 마음을 갖춰야 하리라. 그것에 소유당하는 역전 현상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 런지 참으로 장담하기 어렵다. 우린 이미 그 노예가 된지 오래이지 않은가.
 주조(鑄造)된 자유의 품 안을 나는 언제나 벗어날까. 물욕에 어두워진 내 안의 그늘이 언제쯤 걷혀질까. 더 많은 것을 두 손에 움켜쥐려 안간힘 쓰노라니 마치 맛있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듯 그것에 초연했던 옛 양반들의 깨끗한 손이 불현듯 그립다.

 

김혜식
●한국문인협회, 청주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충북문인협회, 청주문인협회 편집위원
●저서 『내안의 무늬가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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