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원더랜드(Wonderland)
그녀들의 원더랜드(Wonderland)
  • 이호
  • 승인 2010.02.1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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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
▲ 정이현 소설가     © 독서신문

 
『달콤한 나의 도시』는 정이현이라는 작가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젊은 여성들에게 이 책은 ‘스타벅스의 모카 프라푸치노’처럼 유행이 되었다.

정이현 소설의 성공 키워드는 여성들의 심리를 솔직하게 잘 파악한 데에 있다. 정이현은 지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의 속내를 꺼내오는 데 주력했다. 기존의 여성작가들이 선택한 소설 속 ‘여성’들은 김소월 『진달래꽃』의 서정적 자아와 유사한 감이 없지 않았다. 반면 정이현이 만들어 낸 인물들은 『서경별곡』의 화자처럼 자신의 욕구와 원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新여성’을 사용함으로써 2000년대적인 문학의 시작을 기다렸던 사람들의 시선을 잡았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도도하고 발칙한 것인지 아니면 더 내숭을 떨고 있는지’는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 여성들을 그렇게 만들어 낸 사회적 배경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순결을 무기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은 남성중심사회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유리’라는 인물이 추구하는 것은 부유한 삶이다.

‘여자팔자는 뒤웅박’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자기 인생의 구원투수로 기다리는 것은 부유한 삶이 보장된 남자다. 숱한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여자의 머릿속은 시종일관 계산 중이다. 남자의 스킨십 패턴을 파악하듯이 그들이 지닌 것들의 물질적인 가치를 따지고 든다. 그녀는 조커라고 내놓은 순결이 루이비통 가방과 맞바꿈 되자 곧바로 ‘짝퉁’인지 아닌지 따지고 든다.
 
남성들이 여성의 순결여부를 고작 ‘붉은 혈흔’으로 밖에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국 여성 자신들에게도 적용되고 만다. 여자친구와는 잠자리를 원하면서 아내만큼은 첫날밤이 진짜 ‘첫날밤’이길 바라는 남자들의 심리를 대부분의 여자들은 알고 있다. 이것을 역으로 이용해 여자는 자신이 ‘처녀’라는 사실을 내세우며 자신의 몸값을 올린다.

오십평 빌라트, 뉴비틀, 하얏트호텔, 루이비통을 갖기 위한 방정식에서 x의 값은 바로 ‘십계명’이다. 최대한 순결해 보일 것, 이것은 사회가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자들로 하여금 군침을 흘리게 하는 ‘여성성’을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기 위해선 이용할 수밖에 없다.

「트렁크」나 「순수」 속 인물의 공통점은 바로 ‘여자 혼자’ 라는 사실이다. 정부가 있었고 남편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태로 혼자만이 남았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트렁크」의 주인공은 화장품 회사를 다니는 능력 있는 커리어우먼이다. 소나타라는 시대의 흐름을 잘 타고 있는 여자다. 사소한 실수나, 없어 보이는 게으름 따위는 절대 피우지 않는 빈틈없는 여성이다. 보기에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그녀지만, 실은 더 높은 자리를 원하고 있다.

‘권’이라는 다소 권태로운 정부를 버리고 ceo인 ‘브래든’과의 만남에 더 노력을 쏟는다. 브래든은 권이 노리고 있던 지사장 자리를 단숨에 꿰차고 올라온 인물이다. 여자가 현재 위치까지 올라오기 까지 권의 노력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젠 이용 가치가 다했다는 계산은 이미 마친 후다. 세워놓은 목표에 놓인 걸림돌을 가차 없이 쳐내는 것은 불가항력의 일이다.

시대가 아무리 21세기라고 해도 여성이 사회에서 높은 위치에 오르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여자도 사람인지라 위를 향해 뻗친 욕구는 어쩔 도리가 없다. 위로 올라가기 위한 남자들의 노력은 겉으로 드러나도 그럴 듯 해보이지만, 여자들은 여전히 ‘시집만 잘 가면 된다’라는 편견에 묻혀있다. 사회에 진출해도 적정한 한계에 부딪치게 되어있다.

‘권’이든 ‘브래든’이든 노선을 갈아타며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브래든보다 더 높은 사람을 만나면 그녀는 또 그 남자를 잡을 것이 뻔하다. ‘환승’은 이제 이용하지 않으면 본인만 손해인 시스템이 돼버렸다.

「순수」에서 여자는 남편들을 갈아 치운다. 아내라는 위치에 있는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자립이 어렵다. 남편이라는 거대하고 우월한 존재에 눌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자립, 독립의 땅을 밟기 위해선 경제권 획득이 중요하다. 보험금을 시작으로 줄줄이 이어진 남편들의 사망은 여자를 더욱 자유로운 위치에 설 수 있게 도와준다.

‘순수’라는 제목과 주인공의 진술로만 서술된 이 작품은 오히려 여자의 행실을 곱게만 볼 수 없게 만든다. 남편 셋의 죽음과 그녀가 무관하다고 우길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녀를 욕할 수만은 없다. 여자는 남자 없이 독립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트렁크」, 「순수」속의 여자들에게 있어 남자란 결국 독립하기 위한 밑천에 불과하다. 그녀들은 기존의 사회가 정해놓은 위치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싶어 한다.

여성들이 ‘도도하고 발칙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가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속으로 그녀들을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들은 최대한 그 틀을 이용하려고 든다. 결국 그녀들이 꿈꾸는 ‘원더랜드’는 남성과 구분지어지는 여성이라는 사실 없이 한 ‘사람’으로서 보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정이현의 소설을 읽고 나면 일부러 ‘소설로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알고는 있지만 굳이 ‘소설로 쓰지 않은 이야기 같다’ 는 느낌을 받는다. 교묘히 숨기는 것을 미학이라고 여기기보다 드러내는 것을 선택한 정이현은 주목 받을 수밖에 없다. ‘솔직함’이 유행이 되어버린 시대와 부합한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문학이 인정받기 어려운 것처럼 정이현은 그런 기존의 규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새로운 감수성과 트렌드를 적절히 이용한다. 사회와 제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심리를 적절히 자극시켰고, 유행을 선도하는 여성들을 주 독자층으로 만들었다. 
 
/ 이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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