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 길이 있었네.
책속에 길이 있었네.
  • 관리자
  • 승인 2005.11.1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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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 (경기대교수 · 소설가)


 나의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산수유 꽃망울이 막 부풀어 오르던 2월말. 우리를 담임하시던 올백 머리에 모던풍을 풀풀 날리던 선생님은 아쉽게도 전근을 떠났다. 전날 나를 부르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책이다. 책속에 길이 있으니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고 쓰거라. 너의 달란트는 쓰는 것 같구나……. 이건 봉숭아 맨드라미 붓꽃이 들어 있다. 이걸 심어 꽃이 필 때 선생님 네들 보러 올는지도 모른다…….」

 당시 4학년 급장이었던 나에게 선생님은 유언처럼 전별의 정으로 책과 꽃씨를 건네시곤 바람처럼 광시를 떠나셨다.

 2월이 가고 3월이 오던 어느 날 꽃샘바람 속에 5학년 화단 열에 나는 꽃씨를 묻었다. 무슨 모의를 하듯 서둘러가면서 새로 부임한 담임선생님의 눈을 피하면서. 어느덧 꽃이 고개를 내밀곤 비옥한 땅에서 아름다운 빛깔로 화단을 물들였다.

 그러나 끝내 떠난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우리들의 실망은 적지 않았다. 그것이 이별이었고 아픔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건네주신 「소월시집」과 「황토기」를 읽으면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책이 나를 흥미롭게 이끌어 읽고 또 읽고 그리하여 아마도 50여 번이나 이 책들을 읽어냈다.

 그러한 관습은 마침내 나를 독서광으로 만들게 되었다. 독서광은 이 대학 저 대학의 백일장에 기웃거리곤 했다. 입선, 가작, 당선을 맞이했고 이윽고 작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어언 40년 작가생활.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은 분명 길을 열어 주셨고 독서의 흥미를 유발시켰다. 그것이 마침내 작가로서 도전하게끔 했다.

 엊그제가 스승의 날이었다. 조금은 촌스럽지만 나도 몇몇 학생들에게 책을 선물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말을 반복 전수했다.

 「자, 선물이다. 책속에 길이 있었다고 나의 은사가 말씀하셨는데 시간이 지나서 ‘길’을 알게 되더라구…….」

 나는 나와 함께 글을 쓰는 소학회 <글무리> 회원들에게 흥미 유발의 씨앗을 뿌렸다. 그들이 6년 이내 혹은 10년 이내에 작가로서의 길을 들어서는 계기로 만들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로부터 소설을 배우는 학생들한테 선생님으로부터 얻은 꽃씨를 전할 수가 없다. 그들은 지금 시멘트 숲에서 한 뼘의 대지도 없다. 그리하여 나의 시골집 화단에 해거름 없이 챙겨서 꽃씨를 뿌리고 있다.

 스승의 날이 지났다. 오늘의 선생님들은 가르치고 아끼는 제자들에게 책 선물은 장려할 만한 일인 것 같다.

 나의 오늘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이 계획한 작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독서 불황속에서도 궁색하나마 선생님들의 면려와 격려도 책을 읽히는 마당은 마련되지 않을까.

 책이 살면 독자도 살고 인쇄소나 출판사도 산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서점도 살고 국가경쟁력도 아우른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통하여 배웠다.

 

독서신문 1382호 [200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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