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형식으로 풀어가는 스토리텔링
다양한 형식으로 풀어가는 스토리텔링
  • 이호
  • 승인 2010.01.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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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의 『자정의 픽션』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한다. 울고 있거나 싸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재미난 이야기 해 줄까, 라고 말하면 백중 아흔 아홉은 울음을 멈추고 싸움을 멈추고 이야기를 듣기위해 눈동자를 빛낸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도 누군가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다만 그 이야기는 재미가 있어야 하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할 정도로 흥미로워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입담이라도 좋아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이야기는 제 스스로 확대 재생산 되면서 사람들 사이를 떠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또한 이야기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는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지켰다. 누군가 내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 재미는 기본일테고 또 무엇이 있어야 할까. 흥미와 새로움, 낯설고 기이한 세계, 환상과 상상이 맺어내는 유쾌하고 특이한 세계일 수록 매력적이지 않을까. 재미를 잃는 순간, 궁금증과 호기심을 잃는 순간, 닳고 닳은 뻔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당신의 목숨은 사라지고 말테니까.

죽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인가. 박형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다양한 형식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정의 픽션』 가운데 단편 「논쟁의 기술」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론이 제시된다. 자기 영역으로의 초대, 유리한 주제의 선정, 은근히 겁주기, 무시하기, 얄밉게 웃기, 말 돌리기와 문답법, 상대가 모르는 예를 들기, 정신없이 들이대기, 말허리 자르기, 반말하기, 몰아세우기, 딴청부리기, 막나가기, 서둘러 결론내리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도 승리할 수 없다면, 하지만 꼭 승리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자가 나 대신 상대방을 단칼에 베어 줄 수 있다면 하고 바랄지도 모르겠다. 그 힘을 빌어서라도 상대방을 제압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말로 해서 안 될 때 주먹이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건 나의 환상일 뿐, 말 탄 기사도 존재하지 않고 말발굽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칼을 들고 있는 자는 나다. 말로서 안되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을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이 어마어마한 진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학생들에게 소설이 쓰여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집필한 소설’ 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설 쓰기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소설 쓰기의 다양한 방법들이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진술들이었다면 억지일까.
소설의 위기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가 살아 있는 한 소설의 위기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는 살아서 움직이고 모든 삶의 중심에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형서 소설은 살아 있다. 약간은 기이하고 우스꽝스런 상황 속에서도 이야기만은 살아서 움직인다. 소설도 살아 남기 위해 변해야 한다. 텍스트는 확장되고 이야기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시대를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소설은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고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이 소설집의 제목을 ‘자정의 픽션’ 이라 명명한 것은 아닐까.

작가의 말을 곱씹어 보자. ‘내가 생각하는 ‘자정’이란 가라타니 고진이 그리워하는 ‘요란했던 근대’ 이후의 시간이다. 동시에 서사 문학이라는 대가족 안에서 소설이 태동하던,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홀로 자문해보던 근대 이전의 저 먼 ‘새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정’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얕은 꿈을 꾸거나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이다. 어느 쪽이든 아침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이었으며, 소설이라고 불리는 것, 혹은 불려지게 될 것들은 무엇일까.
 
아마 박형서는 여러 가지 형식적 실험과 이야기의 무한 확장을 통해 소설의 미래를 자문해 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저 먼 새벽이 시작되는 그곳에 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박형서 소설은 ‘세헤라자데’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 그 자정, 새벽이 돌아옴으로 하루를 연장시킨 그 희망과도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순한 형식적 새로움의 추구가 아닌 문학적 자의식이 느껴지는 그의 말이 그의 소설을 단순한 유머가 아닌 소설의 미래에 대한 책임으로 받아 들여지게 한다. 또한 소설은 잘 만들어진 허구이며 작가란 그것을 떠안고 가는 자 임을 느끼게 해 주는 발언이다.

그가 자정에 만들어 낼 소설들, ‘저마다 얕은 꿈을 꾸거나 잠을 이루지 못해 고단하게 중얼거리는 시간’ 아침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간에 그가 새롭게 창조해 낼 세상과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 이호 평론가
 
 
▲ 박형서 소설가

◆ 박형서 연혁

1972년 강원도 춘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 졸업
고려대대학원 국문과 석사 과정
2000년 《현대문학》 등단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정류장」으로 우수상 수상
작  품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자정의 픽션』, 『제8회 황순원문학상 작품집』, 『사랑을 믿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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