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출판과 인지(印紙)
디지털 출판과 인지(印紙)
  • 이재인
  • 승인 2005.11.1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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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 (경기대교수 · 소설가)
 
 언제부턴가 출판되는 저작물에 인지(印紙)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저자와의 협약에 의해 인지를 생략함’ 이라는 글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는 우리사회가 점차 신용사회로 바뀌어 가는 문화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져 즐겁기도 하다.
 
 그러나 저자와 출판사간에 심심찮게 판매 부수 관계로 시비를 벌이는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다. 이는 분명 판매 부수에 어딘가 투명하지 않고,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필자는 간단한 약식에 의한 인지가 생략된 책보다는 인주가 진홍으로 붉게 빛나는 인지가 찍힌 책을 사게 되었을 때 훨씬 즐겁다. 그 작가의 직접적인 사인(sign)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마다 사용한 인장문(印章紋)의 문양과 스타일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작가들의 인장은 밋밋한 일반 도장일 경우보다는 전각자(篆刻者)의 예술품으로, 독특한 필체와 장인의 솜씨를 완상(玩賞)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필경 그 도장을 즐겨 사용했을 저자를 떠올려보는 즐거움도 자못 크다. 게다가 내 자신이 그런 탓인지, 그 인지는 직접 저자가 손으로 찍었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있기도 하다.
 저자와의 만남은 책의 내용이 펼쳐놓는 세계 속에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날인(捺印)도 저자와 독자 사이의 펼쳐지는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인장은 아무래도 작가의 정체성의 집약적 표상이며, 인장이 찍힌 책은 저자의 신표이자 자기표식이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멋스럽고 예술적인 전각가의 솜씨를 인지에서 발견할 때마다 종종 매혹과 신선미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탓에 필자는 오래 전부터 한국 문인들의 저작물에 찍혔던 인장, 낙관 도서인(圖書印)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것이 벌써 40여년 세월이 흘렀다. 그 결과로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인장 박물관을 하나 세우기도 했다.
 인장은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것은 아니어서 테마 전시관을 마련하기도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여기에 인장을 활용했던 한자 문화권의 아시아 각국을 돌면서 희귀하고 독특한 인장을 수집하기도 했다. 유교권의 다른 나라들의 인장들도 각각 특색이 있어 감상의 즐거움을 높여준다.
 때때로는 수집벽이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고 자문하기도 하지만 재탐(財耽)이 아니라 문화 예술품을 모으고 보존하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위로하는 편이다.

 얼마전 일본의 어떤 출판사로부터 출판 제의를 받고 일어판 소설집 출간을 진행 중에 있다. 그 쪽의 요구로 인지를 찍는 즐거운 수고를 하면서 선진 일본의 진지함과 인장에 대한 이해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도 아울러 고백해 두어야겠다.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디지털 시대임이 분명하다. 모든 것이 0과 1로 환원되어 컴퓨터 칩 속에서 계산되고 처리되는 시대다. 그러나 책에서만큼은 인장이라고 하는 아날로그의 흔적을 떼버리고 싶지 않다.
 책의 집필 도구도 디지털 도구요, 책을 출판하는데 이용되는 것도 디지털 도구였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럴수록 주홍 인주 물든 인지와 인장문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다. 다소 인지를 붙이는 수공 작업에 품이 더 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저작물, 그것은 개인으로서 작가의 정신적 집약체이며 동시에 인류의 지식 집적물이다. 뿐만 아니라 서적에는 시각적인 예술성도 담겨지게 마련이다. 책을 잘 팔리게 하기 위해서만 표지를 디자인하고 레이아웃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과 책의 외형 모두 훌륭한 책이 더 값진 책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으리라. 이런 내용과 형식의 어울림 가운데, 인지 문화가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빛났으면 좋겠다.

  오늘도 나는 인지에 도장을 찍으면서 이 책이 만나게 될 어느 이름 모를 독자를 상상해보는 즐거움을 맛본다. 그리고 이 책이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언정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손에 들리우기를 희망해본다. 그리고 나아가 세상살이에 지친 가슴도 따뜻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는 소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독서신문 1378호 [200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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