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테러
백색 테러
  • 김동민
  • 승인 2005.11.11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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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 (소설가 · 문학평론가)
눈이 흔치 않은 고장이었다. 어쩌다 날린다는 게 바람을 동반한 진눈깨비가 고작이었다. 그럴 때 하늘은 마치 마른버짐이 번진 얼굴 같았다. 무릎까지 폭폭 빠지는 폭설은 전설 같은 얘기였다.
 그런데 전설이 현실로 닥쳤다. 기상청이 생긴 이래 최고 적설량을 기록했다고 매스컴은 흥분했다. 사람도 개도 흥분했다.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와지끈 부러져 내리는 나뭇가지 소리도 비명이 아니라 환호처럼 들렸다.

 그 중에도 가장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곳이 남자 중학교였다.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평소에도 넘치는 장난기를 주체 못해 안달 나 하는 남중학생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는 신마저 예측하기 힘들 터였다. 여느 때 같으면 아침자율학습 시간이지만 아이들은 교실에 진득이 붙어 있지 못하고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선생들도 하나같이 들뜬 표정으로 교무실 창을 통해 온통 백색 천지인 바깥을 내다볼 뿐 아이들을 교실로 몰아넣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갈수록 눈송이는 굵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다. 전교 선생과 학생들 시선을 한몸에 받은 이가 있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그날따라 많이 늦게 출근하고 있는 처녀선생 백곤지였다. 처음에 모두는 눈사람이 교내에 들어온 줄 알았다. 세상이 한빛인 속에 의상마저 하얀 털이었으니. 그렇잖아도 여선생들 가운데 제일 예쁜 그녀인데 눈세상 속에 눈옷을 입고 나타났으니 실로 눈천사였다. 그녀의 독특한 복장은 식지 않는 관심을 자아냈다. 상기된 얼굴, 흰사슴 같은 몸매, 상냥한 미소. 바야흐로 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그녀는 성녀이자 창녀였다.

 차임벨이 울렸다. 무작정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선생도 학생도 아쉬움을 남긴 채 정상 일과로 들어가야 했다. 곤지선생을 에워싸고 돌던 선생들은 출석부를 챙겨들고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곤지선생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그녀 마음은 풍선 같았다. 집에서 나오기 전 거울에 비춰본 자기 모습은 스스로 반할 만했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마당에 쌓인 눈을 보는 순간 오늘은 꼭 무슨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백설공주가 될 것이다. 곤지선생은 은세계 속으로 막 들어서는 흰 요정같이 우아한 동작으로 걸었다. 세상 모든 것이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듯했다. 복도를 걷는 그녀 발걸음이 나비 날갯짓처럼 가벼웠다.

 곤지선생은 2학년 3반 교실로 향했다. 생물교사인 탓에 그녀는 종종 짓궂은 애들로부터 황당한 질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교직 경력이 쌓여 매끄럽게 넘어갔다. 초년생 시절엔 혼자 낯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어떨 땐 화장실에 들어가 엉엉 울기도 했었다. 지금은 모두 물처럼 흘러간 과거라고 그녀는 또 배시시 미소지었다. 반드시 신나는 일이 있을 거다, 오늘은.

 그랬다. 그녀는 몰랐다. 악동들의 사전 모의를. 작은 사탄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마의 소굴로 들어서고 있었으니. 아니 어떤 조짐은 있었다. 그녀도 그것을 감지했다. 교실 쪽이 너무나 조용하다는 게 그것이었다. 복도는 물론 교무실까지 크게 들릴 정도로 소란을 피우는 애들이었다. 선생이 입실하고 반장이 차렷, 경례를 하고 나서도 가라앉지 않는 분위기였다.

 한데 이날은 휴교일 같았다. 그녀는 왠지 모를 약간의 두려움마저 느끼며 조심스레 교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녀는 교실 안을 빙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수업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모범생들같이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엎드리거나 서 있는 아이는 하나 없었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기분에 사로잡혔지만 특별히 어떻게 할 언동도 없었기에 보통 때처럼 교탁 앞에 섰다. 반장이 일어나 구령을 붙이기 시작했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아이들이 한입으로 복창했다. 그녀도 고개를 숙이며 반갑습니다, 했다. 그러고는 막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백색 테러. 그보다 더 적의한 표현이 다시 있을까. 수십 개 총탄이 정확히 그녀를 향해 터트려졌다. 한순간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돌멩이, 아니 쇳덩이가 얼굴이며 가슴이며 팔이며를 강타하는 느낌. 벌떼의 집중공격이라고나 할까.

 그녀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기운이 핏물 같았다. 하얀 피. 그렇게 부드럽고 고운 눈송이에 힘이 가해지면 세상 다시없는 흉기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곤지선생 이마뿐만 아니라 뺨, 콧잔등, 입술, 가릴 것 없이 곤지가 찍혔다. 귀티 나는 고급 털옷은 금세 물기에 젖어 후줄거니 늘어져버렸다. 그야말로 급습이었다. 책상 아래 숨긴 손에 흰 무기를 감추고 있을 줄이야. 반란군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계획은 한치 오차 없이 적중했다. 눈뭉치 세례를 받고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라니. 얼마나 가슴 짜릿한 순간인가. 선녀 같은 그녀가 속수무책 당하는 장면이여.

 그러나 뉘 짐작했으랴. 다음에 벌어질 사태를. 곤지선생은 그대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출석부는 물론 가지고 왔던 학습 교재도 그냥 둔 채로. 그렇지만 아이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기엔 그 희열이 너무 컸다. 백곰을 물리친 원숭이들처럼 의기양양했고 웃기 대회장에 온 사람들같이 끝없이 웃었다. 맨 처음 제동을 건 사람은 부반장이다. 눈 크고 겁 많은 그는 우선 반장 웃음부터 막았다.

 “아무 일 없을까?”
 반장은 여전히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 부반장이 또 물었다.
 “괜찮을까? 선생님들이 우리 반을….”
 비로소 반장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그때쯤 교실은 많이 조용해져 있었다. 웃기에도 지쳐버린 것이다. 반장이 일어서더니 최초로 그 모의에 불길 지핀 저 뒷좌석 아이를 보고 큰소리로 물었다.
 “제용아, 별일 없겠지?”

 제용이란 애가 앉은 채 되물었다. 무슨 일 말인데? 부반장이 대신 답했다. 선생님들이 그냥 계실 것 같냐구. 순간, 제용뿐만 아니라 반 아이들 모두 안색이 싹 바뀌었다. 무엇보다 곤지선생님이 다시 돌아올 낌새가 없었다. 처음에 모두는 선생님이 곧 다시 들어오시리라 믿었다. 가벼운 꾸중 정도야 이미 각오했던 바였다. 어쩌면 선생님도 마음이 들떠 이깟 장난이야 너그러이 넘겨주시리라 기대했다.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이는 선생님 아니냐.

 “반장, 교무실에 가 봐. 선생님이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보고 오란 말야.”
 누군가 말했고 그게 신호탄이었다. 모두들 반장에게 상황을 캐보라고 주문했다. 반장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섰고 부반장도 같이 교실을 나갔다. 두 사람은 이내 돌아왔다. 그리고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교무실에도 행정실에도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더라고.

 아이들 얼굴에 걱정과 초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 몰골로 선생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혹시 댁으로 가버리신 건 아닌가. 그렇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교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용들 햇! 옆반에서 수업하시는 선생님이 오시면 어쩌려고 그래? 부반장 말에 하나같이 어깨를 움찔했다.
 태풍 전야 같은 고요가 덮쳤다. 옳았다. 태풍 전야였다. 태풍이 오고야 말았다. 저 태풍 같은 사나이로 악명 떨치는 체육선생 강태풍이 나타날 줄이야. 얼마나 주먹이 센지 한번 맞으면 태풍에 뿌리째 뽑히는 나무처럼 무너지게 하는 그였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아이들 간담을 졸이게 하는 게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공공연한 비밀. 곤지선생과 태풍선생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조만간 결혼식을 치를 거란 풍문도 나돌았다. 그렇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은 사색이 돼버렸다. 백번 후회해도 ‘던져버린 눈덩이’였다. 곤지선생 뒤엔 태풍이 있다는 사실을 왜 간과했던가. 눈, 그놈의 눈 때문이었다. 눈이 눈을 멀게 했다. 마침내 태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모두 운동장으로 나갓! 한놈도 빠짐없이, 알겠어? 선착순이닷!”

 책걸상 움직이는 소리가 함부로 났다. 사십 명 넘는 인원이 집합하는데 오분도 걸리지 않았다. 눈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지구 전체를 눈더미 속에 매장시켜버릴 심산 같았다.
 “자, 지금부터 포복을 실시한다.”
 맙소사. 그 눈밭 위를 기라니. 아이들은 머뭇머뭇 했다. 순간, 맨 앞쪽에 섰던 아이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작열한 태풍의 주먹. 아이들은 허둥지둥 엎드렸고 네발짐승처럼 기고 또 기었다. 교복은 순식간에 눈흙 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반장 눈이 삼층 교장실과 교무실로 향했다.
 당연히 내다보고 있어야할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영문인가. 그때 부반장 눈에 띄었다. 이층 양호실 창가에 서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곤지선생 모습이. 그러나 부반장은 알 길이 없었다. 그녀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세상은 오직 백색 테러만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끝)

독서신문 1387호 [2005.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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