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황당한 이유
무엇보다 황당한 이유
  • 조완호
  • 승인 2005.11.1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완호 (한성디지털대 교수 · 계간 문학마을 발행인)
 그동안 꽤 잘 나가던 위인들의 흉악한 몰골이 백일하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새해 벽두부터 주변이 온통 혐오의 소굴처럼만 보인다. 억울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웬만한 사람들이 가서 울고불고 애원해보았자 씨도 먹혀들지 않으니 중간에 세운 거간꾼에 불과한 변호사라는 자가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미끼로 치부의 붉은 눈을 껌벅이고, 한때 유명한 학교의 수장首長까지 지낸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세인들의 돌팔매로 인해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백기를 흔들며 달아나는 우리 시대의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방탕하기 그지없는 두 사내가 하루는 붓다를 찾아와 뵙고 출가出家해 비구가 되겠다고 아뢰었다.
붓다는 이들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한 방에 있게 했다.
그러나 뭐가 달라질지 알았던 두 사내는 모처럼 멍석까지 얻은 폭이니 승방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온갖 음탕한 얘기로 밤낮을 가리지 못했다.
 이를 한심스럽게 여긴 붓다는 그들 중 한 놈을 다른 방에 가 있게 하고, 신통력을 발휘해 방에서 내쫓긴 자의 모습으로 위장한 다음, 남은 한 놈의 곁으로 가 이르기를
“매일 말에 취해 들떠 살 필요가 무엇인가. 우리 같이 가 실제로 그게 정말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확인하기로 하세”
하고는 앞장 서 승복을 너풀거리며 유곽으로 갔다.

 “우리는 도를 닦고 있는 사람들이니 일체의 다른 짓은 하지 않고, 다만 눈요기만 하고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룰 테니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말고 알몸으로 우리 앞에 서주시오.”
이미 붓다가 신통력을 통해 만들어놓았던 각본인지라, 여인은 두 말하지 않고 요구대로 응했다.
 사내는 잠시 눈에 휘둥그레져 황홀해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는 대단한 그 무엇이 없음을 알고 이내 실망하는 듯했다.  

 “보게나,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한낱 화장이나 치장에 따른 현란함에 불과한 것이네. 진정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꼭 보지 않아도 될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에 몸과 마음을 다 망치는 것이네. 몸뚱이라고 하는 것은 똥과 피를 담고 있는 가죽주머니에 지나지 않는 것이네. 도대체 자네가 저것에 왜 그리 집착했는지 잘 생각해보게. 명예니 권세니 부유함이니 그런 것들도 결국은 한낱 냄새가 진동하는 오물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엇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주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길지 않고, 그것이 기록으로 남아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생永生을 보장해주는 특별대우의 티켓이 아니다.
주어진 역할에 따른 나름의 도리를 다하고, 그것에서 보람을 찾는 것만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향유할 수 유일한 길이다.
 촛불은 백 개를 켜놔도 겨우 한정된 주변만 밝힐 뿐 곳곳을 밝게 하지는 못한다. 천 개나 만 개를 켜놓고 해의 밝음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이나 세속적인 권세는 촛불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을 대단히 여기지 않고 스스로 버리는 것만이 세상에 악취를 남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결국 건강을 지키려는 것은 가죽주머니의 어느 한 쪽에 구멍이 나 오물이 새어나오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방비防備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사후死後까지도 생각해 어떤 일을 힘들여 도모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무덤을 파고 그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을 제 손으로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남의 등이나 치고, 주어진 지위를 이용해 악행이나 자행하려면 무엇 때문에 힘들여 배우고,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밤바람 맞으며 나돌아 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위로부터의 혁명만이 희생을 치루지 않고 목적에 이를 수 있다. 우리 근대사가 오욕을 얼룩진 것은 혁명의 주체가 민중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주머니에 무엇을 더 담는다는 것은 오물을 더 만들어 힘들여 싸들고 다니는 일과 다르지 않다. 짐을 가벼이 해야만 크게 힘들이지 않고 홀가분한 행보를 계속할 수 있다. 내려놓아야 할 것을 공연히 지고 다니는 것은 고름이 살이 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다.

 하필 날씨도 차가운데 반사교사反射敎師의 모범을 통해 대중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 철장에 갇혀 있는 거간꾼이나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을 한 노인에게 뭐라 위로를 드려야 할지 황당하기만 하다.

독서신문 1375호 [2005.01.1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