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이 세운 후카쿠사의 이나리대사(稻荷大社)
신라인이 세운 후카쿠사의 이나리대사(稻荷大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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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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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 (문학박사 · 경기대 초빙교수)

 

 신라농업신을 모신 이나리신사

 「진이여거(秦伊呂巨,8c)는 진중가기촌 가문의 조상이다. 그는 야마시로국(지금의 쿄우토 땅)의 후카쿠사(深草) 터전의 부자였다. 그는 떡을 표적으로 삼아 하늘에 던지며 활을 쏘았다. 화살에 맞은 떡은 순식간에 백조로 변신하여 영마루로 날아올라 떨어지니 그 자리에 벼(稻)가 되어 솟아났다.
이에 진이여거는 이 산 위에다 이나리(稻荷)라는 이름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후시미이나리신사(伏見稻荷神社)’의 기원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고대사학의 태두(泰斗)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박사는 이렇게 필자에게 후카쿠사의 명소, 이나리신사에 대해 밝혔다. 이곳 쿄우토의 이나리신사야 말로 고대 일본에서 한반도의 벼농사를 일으킨 고대 신라인들의 농업신을 모시고 제사지냈던 유서 깊은 옛터전이다.

 「이 고장으로 볍씨를 가지고 도래한 진씨(秦氏) 일가는 일찍부터 둑을 막아 저수지와 수로를 만드는 ‘관개농업’을 시작했다」는 것이 쿄우토산업대학 고대사학 교수 이노우에 미쓰오 (井上滿郞)씨다(『古代の 日本と 渡來人』1999).

 이노우에 교수는 고대 신라인 진씨 가문에서 만들었던 쿄우토 ‘카쓰라강(桂川)’의 큰 댐인 방조제(かどのおおし)에 관한 기록들이 생생하다고 예시, 고증하고 있다. 한반도의 선진 관개농업의 발자취는 최근에 안동땅 청동기 유적에서 발굴되어 화제가 된 바 있기도 하다.

 지금부터 벌써 2800년 전에 저수지며 보의 자취가 발굴되었다는 것이 지난 2005년 5월, 이한상 교수(동양대 박물관장)에 의해 밝혀졌다.
후시미이나리대사에서 제사 모시는 큰 신은 ‘우카노미타마노오오카미(宇迦之御魂大神)’라는 신라계의 농업신이다. 진이여거라는 큰 부호가 이 터전에서 벼농사로서 크게 성공한 때문에 조상의 농신을 제사지내게 된 것이 오늘에 까지 계승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늑대설화의 주인공 진대진부(秦大津父)

 그런데 이 이나리신사 터전이 이루어지게 된 동기는 이미 진이여거공의 윗대인 6세기 중엽의 진대진부(秦大津父)라는 인물과 인연이 맺어졌던 것이다. 이 고장 후카쿠사에 살던 신라인 진대진부는 큰 부호였다. 그는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말을 탄 채 ‘이세’ 땅을 다녀오게 되었다.

 이때 한 마리의 늑대가 다른 늑대에게 피투성이가 된 채 물려 뜯기고 있었다. 진대진부는 그 늑대를 가엽게 여겨, 부하들을 시켜 사나운 늑대를 쫓아버리게 했다. 이래서 몹시 다친 늑대는 빈사지경에서 간신히 살아났다. 이런 일이 있는지 얼마 지나서였다. 후카쿠사의 진대진부 저택으로 왕실의 고관들이 찾아왔다.

 “수장(首長), 진대진부공 안녕하십니까. 대왕마마께오서 수장님을 모시어 오라는 어명을 받들고 왔나이다“
진대진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냐하면 킨메이대왕(欽明大王, 539~571)이 자기를 부른다는 게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킨메이 대왕은 요즘 새로이 왕위에 즉위한 사람이다. (註. 이 당시까지는 왕호가 천황(天皇)이 아니고 대왕(大王)으로 불렀으며 약 백년 뒤인 서기 669년 이후부터 일본왕실은 왕(王) 또는 대왕(大王)의 칭호가 천황(天皇)으로 불리게 된다.)

 그렇다 킨메이 대왕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생전 보지도 못한 자기를 부르는 게 이상스러웠다. 물론 나라의 서울로부터 과히 머지않은 후카쿠사(深草)땅의 수장(首長)이니, 어쩌면 즉위한 새 왕의 부름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진대진부는 조정에서 온 신하들을 따라서 말을 타고 나라의 조정에 이르게 되었다. 즉위한 젊은 왕은 진대진부를 보더니 크게 기뻐하는 것이었다. 킨메이왕은 지금까지 후시미의 후카쿠사 땅에서 농토를 개간하면서, 많은 부하들을 이끌고 크게 번창하는 신라인 지도자 진대부에게 융숭한 식사를 대접했다.

 왕은 함께 수라를 들면서, 어린 시절에 꿈을 꾼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소년 시절의 킨메이왕은 꿈에 수염이 허연 노인을 만났던 것이다. 그리고 노인은 소년에게 “장차 진대부라는 사람을 찾아내서 잘 위해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킨메이왕는 진대부에게 그동안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라도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진대부는 근자에 싸움에 크게 부상당한 늑대를 구해서 숲으로 무사히 돌려보냈던 사실을 아뢰었다. 진대진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왕은 크게 감동했다. “인자한 그 마음씨. 그 가여운 늑대가 필시 그대에게 은혜를 갚게 되었나보오. 잘 한 일이오.” 

 이래서 그 뒤로부터 진대진부는 킨메이대왕과 친하게 지내면서, 왕실을 돕게 되었고, 또한 진대진부는 더욱 더 그의 부귀와 명성이 커진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늑대설화」는 필자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일본의 역사의 옛기록에 나오는 역사기사(『일본서기』,720)다.

 

 비단 짜는 법을 전수한 진주공(秦酒公)

 진대진부공에 뒤이어 진하승(秦河勝, 6c~7c)공이, 신라 진평왕이 왜왕실에 보내주신 적송(赤松) 나무불상인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교우토의 우스마사(太秦)땅에 모셔다 지은 사찰이 지금의 쿄우류우지(廣隆寺)다. 이 진공들의 저 윗대 5세기 후반으로 올라가면 진주공(秦酒公)이라는 건물이 존재하기도 한다.

 거문고를 잘 뜯기로 이름났던 진주공은 그 당시 유우랴쿠(雄略,456~479 재위)왕과 친분이 두터워 왕실에 머무는 ‘재무장관’직의 조신이었다. 진주공은 180개 조직을 거느리고 우스마사에서 비단 제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신라에서 누에치기와 비단 짜는 기술진을 거느리고 건너왔다는 설도 있다.

 왕궁 건축가로 빼어난 기술을 가진 잘생긴 건축가 ‘미타’를 유우라쿠왕이 궁녀를 넘본다고 질투하여 사형을 명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진주공은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왕으로 하여금 사형집행을 중지케 했던 역사의 일화로 유명하다.

독서신문 1386호 [200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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