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이었습니다
무협소설이었습니다
  • 김동민
  • 승인 2005.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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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 (소설가 · 문학평론가)
그는 무명시인이다. 그렇고 그런 문학평론가 겸 심사위원은 그렇고 그런 문예지에 실린 그의 등단시를 그렇고 그런 시라고 했다. 주례사비평도 악평도 아닌 그저 그렇고 그런 평이었다. 그는 별로 실망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시인이면 족하기에. 전업(專業) 문인이 아닌데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탁월한 시를 기대할 수도 없잖은가, 그런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꼭 한 가지 문학적 소원이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어떤 기억에서 비롯된 성질의 것이다. 일단 그 기억에 휩싸이게 되면 시인은 다른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마치 독감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듯 그 기억이 몰아오는 열병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길 속수무책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 그의 발길은 어쩔 수 없이 정해진 한곳을 향한다. 시인은 꼭 쓰고 싶은 것이다. 소설 한 편을.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그 병을 치유할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믿기에.

 그는 중학교 모교에 가 있다. 당시 자기 반 교실이 어느 것인지 이제 기억에 흐릿하다. 교사(校舍)를 개축해버린 탓이다. 그렇지만 그는 교정에 서면 지난날 교실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진다. 그리고 그 친구. 삼십 년 전 급우. 시인의 몸과 마음은 어느 새 까까머리 중학 2학년으로 변해 있다. 까까머리 그 친구도 보인다.

 중요한 시험을 불과 이틀 앞둔 때였다. 토요일 오후. 반 아이들 모두 하교한 후였다. 교실에는 그와 친구 둘만 남았다. 그는 운동장 쪽 창가 칠판 가까운 맨 앞좌석에 앉고, 친구는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복도 쪽 창가 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시집을 읽고 있었다. 시험공부 대신. 시험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의 매력이 너무 강했다. 시에 빠져 그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간혹 저 뒷자리 친구를 돌아보긴 했다. 이렇게 생각하며.

 ‘저 친구, 역시 전교 1, 2등을 다투는 공부벌레답게 지독히 공부밖에 몰라. 수학 문제 풀고 있나, 영어 단어 외울까.’
 그런 가운데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조금씩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스며드는 빛의 잔해로 그가 있는 창가는 아직 밝았지만. 어둑한 속에서도 글이 보이는지 친구는 시종 무슨 책 속에 코를 처박고 있었다. 형광등을 켤 법도 하건만 공부하느라 그런 사실조차 망각한 듯했다. 무섭고 끔찍한 집중력.

 시간은 계속 흘러 마침내 친구는 글씨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제 불을 켜든지 그만 집으로 가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친구가 이쪽으로 왔다. 그러더니 그가 지금까지 보고 있던 책이 시집인 것을 알고는 약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짧은 순간, 그는 친구 낯빛에서 분명히 읽었다. 끈끈한 동지애 같은 기운을.

 “너, 여태 시 읽고 있었니?”

 친구는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그렇게 물었다.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신도 모르게 시집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괜히 무안하고 가슴까지 쿵 했다. 친구가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아닌데. 하지만 그런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친구가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서 책상에 놓인 책을 집어 들고 다시 와 그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번엔 그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것은… 뜻밖에도 교과서도 참고서도 아니었다. …무, 협, 지, 였다!? 당시 유행하던 ××지. 그도 방금 친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너, 여태 무협지 읽고 있었어?”
 친구가 씨익 웃었다. 그처럼 무안해하거나 책을 덮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어둠이 박쥐 날개처럼 펼쳐진 교실에는 두 개의 큰 웃음소리가 함부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킬킬킬.”
 “히히히.”

 우리가 여?보던 책들이 시집과 무협지였다니. 다른 아이들은 모두 눈이 빠져라 시험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이때에. 그렇지만 그는 그저 기분이 좋았다. 친구도 그런 듯했다. 둘은 어깨동무까지 하고서 웃고 웃었다.

 홀연 교실 안이, 석가가 설법했다는 영취산같이 느껴졌다. 시집과 무협지가, 석가가 대중에게 보였다는 연꽃처럼 여겨졌다. 염화미소. 이심전심.
 그러나 그는 몰랐다. 꿈에도 몰랐다. 현실에도 몰랐다. 다음 주 월요일에 벌어질 사태를.
 시험을 치르는 날. 그도 어제 일요일에는 오늘을 대비해 공부를 했었다. 풀고 있는 문제들이 시같이 보여 곤혹스럽기는 했지만.

 “허, 그 자식이 시험 보는 날 학교에 안 나와?”
 담임선생은 기도 안 차는 모양이었다. 더욱 황당한 건 그 친구가 일요일에 어디 나간 뒤로 어젯밤 집에도 안 들어왔다는 부모와의 전화 통화였다. 친구 부모는 설마 오늘 학교에 갔겠지 믿은 듯했다. 천하가 다 아는 ‘범생’이 시험날 결석할 리는 없겠기에. 일요일은 어디 도서관 같은 데서 밤샘 쳤겠지 했고. 아마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보았다.

 반 아이들은 시험은 뒷전이고 그 친구 얘기에 넋들을 놓았다. 너나없이 시간을 허비하니 똑같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쨌거나 한 명은 제쳐놓았다고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더욱이 화제 삼을수록 감칠맛 날 일이었다. 농땡이 중에는 공부를 안 해 시험 볼 자신이 없다고 시험날 빠져먹는 아이도 없진 않았지만 그 친구가….
 결국 시험 기간 사흘 내내 친구는 오리무중이었다. 그의 눈에는 유난히 희고 가지런한 이를 내보이며 무협지를 들어 보이던 여드름투성이 얼굴이 삼삼했다. 그렇다고 선생님이나 학교를 찾아온 친구 부모에게 친구가 무협지를 보고 있었노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 시집을 읽고 있었다는 게 은연중 강박감으로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그 무협지가 친구 사고와 관련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친구 행방이 드러난 것은 닷새가 흐른 후였다. 그는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j시에서 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m항. 거기 부둣가에서 행려병자 같은 몰골로 발견된 것이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루머인지 알 순 없지만 교내에는 이런 말들이 브레이크 장치 없는 차량처럼 질주했다.

 …친구는 일요일 오전에도 학교에서 무협지를 읽다가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갔는데 집 대문에 단도가 꽂힌 쪽지가 나붙어 있었다. 놀라 보니 ‘네 동생을 구하려면 지금 당장 m항 부두로 와라.’ 라는 메모가 휘갈겨져 있는 것이다.
 친구는 그 길로 납치범들로부터 동생을 구하기 위해 m항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동생은 보이지 않았고 친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동생을 찾아 같이 집에 가야 한다고 결심, 그렇게 여러 날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헤매었다. 한편 친구가 쪽지를 발견한 그 시각 동생은 집 근처 사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참 유치한 장난치고 있네.”
 “다 거짓이야. 그 자식이 꾸며낸…. 짜아식, 소설 쓰고 있어.”
 “정말 웃긴다 그지? 학교 오지 않은 핑계를 대려면 좀 그럴싸해야지, 그 자식, 영 맹추 아냐?”
 “그래, 그래. 공부 좀 해서 머리 좋은 줄 알았더니….”

 아이들은 여전히 등교하지 않는 그 친구를 도마에 올려놓고 제멋대로 난도질을 해댔다. 선생님들은 사유를 묻는 아이들을 무섭게 꾸짖으며 쓸데없는 소리 더 물어 나르면 당장 퇴학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 속에 그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이 그였다. 그는 믿었다. 조금도 엉터리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러자 그는 온몸에 소름이 오톨도톨 돋았다. 나도 언제 그 친구처럼 돼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부처와 제자 가섭(迦葉)같이 아무도 모르게 마주보며 미소 지었던 그날의 비밀.

 그는 그 친구와 얽힌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 노력했다. 예리한 칼날로 푸른 달빛을 가르는 무림 고수처럼 그 시간을 싹 베어버리고자 했다. 그러나 어린애가 먹고 싶어 하는 왕사탕 같은 달콤한 유혹 하나만은 떨치기 힘들었다. 그 친구 이야기를 꼭 소설로 남기고 싶다는.
(끝)
 
독서신문 1390호 [2005.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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