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길
노란 길
  • 김동민
  • 승인 2005.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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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민 (소설가 · 문학평론가)
병원 뜨락 잔디는 노랗게 시들어 가는 중이다. 곳곳에 청색 줄무늬 환자복 차림의 환자들과 보호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띈다. 이만큼 떨어진 벤치에 앉은 두 사내는 묵묵히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백일홍 그늘 아래였다.

 둘 다 환자복이다. 한 사람은 얼굴이 검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창백한 얼굴이었다. 검은 얼굴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쪽 말을 듣고 곰곰 생각해 봤는데 정말 이상하군요.”
 창백한 얼굴 사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래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검은 얼굴 사내가 하관이 쪽 빠진 얼굴을 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가 초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고요?”

 턱이 약간 각진, 창백한 얼굴 사내가 말했다.

 “그랬지요. 우리 나이로 여덟 살….”
 검은 얼굴 사내가 되뇌었다.
 “만(滿)으로 치면 고작 일곱….”
 창백한 얼굴 사내도 곱씹듯 했다.
 “…어린 나이였죠.”

 그 대화가 끝이었다. 둘 사이엔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노랑색 담요 같은 잔디밭 위로 역시 노란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고 있다. 해가 서산머리로 완전히 떨어지고 나면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할 것이다.

 저편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문득 자지러지듯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내인 듯한 노파가 늙은이 동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치 잽싸게 물병에서 물을 따라 컵을 입에 대주었다.
대학병원 정문 밖 도로 아래쪽을 흐르는 강으로부터 물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꺼억꺼억 하는 소리가 흡사 강한 힘에 목젖을 억눌린 사람이 내는 소리 같았다.

 “그러니까 그 어린 나이에….”

 검은 얼굴 사내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막 기지개를 켜는 사람처럼 했다. 창백한 얼굴 사내도 선잠을 깬 것처럼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 내 나이가 쉰둘이니 꼭 사십사 년 전이군요.”

 검은 얼굴 사내가 흠칫 몸을 떠는 게 창백한 얼굴 사내 눈에 똑똑히 비쳤다.

 “사십사…. 죽을 사(死)가 둘이군요.”

 검은 얼굴 사내 두 눈에 공포의 빛이 서렸다. 왠지 까마귀 날개에 가려진 듯한 눈빛이었다. 창백한 얼굴 사내가 벌컥 화를 냈다.

 “또 그런 소릴….”

 검은 얼굴 사내가 머쓱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어떡합니까.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은….”
 창백한 얼굴 사내가 붉은 음성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내가 여덟 살 때 일을 한 번 더 말하지요.”
 검은 얼굴 사내 표정은 더없이 복잡해 보였다. 창백한 얼굴 사내 이야기가 어쩐지 위험한 느낌을 담고 이어졌다.
 “그때 당시 일흔다섯 연세로 돌아가신 제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십년을 더 장수하셨다고요.”
 검은 얼굴 사내는 ‘장수’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글쎄요. 일흔다섯까지 산 게 장순지….”
 “아, 지금이야 다르죠. 하지만 옛날에는….”
 “사십사 년 전이 옛날…. 하기야 옛날이긴 하군요.”
 “그래도 그쪽 얘길 들으니 바로 어젯일같이 느껴집니다.”
 창백한 얼굴 사내가 피식 웃고 나서 사연을 털어놓는다.
 “설마 직접 당한 나보다 더 생생할까요. 하여튼 그때….”

 그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부터 그는 알 수 없는 병을 앓기 시작했다. 아무도 병명을 알아내지 못했다. 어떤 의사도 손을 못 썼다. 신열이 펄펄 끓었고 헛소리를 해댔고 정신을 놓아버렸다. 집안에서는 할아버지 초상보다 손자 목숨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심한 병마에 시달릴 동안 겪었던 그 기이한 일을.

 “두 사람 정도 나란히 서서 걸어갈 만한 그런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았어요. 한데 양쪽에 쭉 피어 있는 게 노란 꽃이었습니다. 노란 꽃이 끝없는 길을 따라 한없이 피어 있더군요. 아, 뿐만이 아니었어요. 하늘도 노랬습니다. 바로 황천이었지요.”

 창백한 얼굴 사내가 숨이 가쁜지 잠시 쉬는 틈에 검은 얼굴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꽃도 노랗고 하늘도 노랬다, 그런 말이지요?”
 그렇게 묻는 사내도 노랗게 뜬 안색이었다. 창백한 얼굴 사내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요. 한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
 “그때 난 여덟 살 짜리 꼬마에 불과했거든요. 그래서 저승이 황천이란 것을 아직 모르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말입니다.”

 창백한 얼굴 사내 표정도 검은 얼굴 사내 못지 않게 질려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얼굴 사내가 말했다.

 “저도 그 점을 알 수 없습니다. 혹시 댁이 진작부터 알고 계셨던 건 아니었을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창백한 얼굴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확실합니다. 내가 저승 하늘이 노란 색이란 것을 처음 배운 건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입니다. 이건 확실한 기억입니다.”

 검은 얼굴 사내가 곧 다시 말했다.

 “그럼 도대체 그런 사실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나요. 아무리 신열이 나서 인사불성이었다고는 해도 어떤 선험지식이 없고서야….”

 창백한 얼굴 사내가 한숨을 토했다.

 “그러게 답답하지요. 지겨울 정도로 되풀이하는 소립니다만 전 그런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 길에는 노란 꽃이 만발했고 황천이 드리워져 있었으니까요.”

 검은 얼굴 사내가 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분이 같이 소풍가자고 하시더라면서요?”

 창백한 얼굴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그렇습니다. 이, 이렇게 내 손을 잡으시고는….”
 그러면서 그는 검은 얼굴 사내의 파리한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싸늘한 감촉이 느껴져서 그는 얼른 손을 놓았다. 검은 얼굴 사내가 음모를 꾸미는 사람처럼 고개까지 숙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죽은 사람이 손을 잡고 같이 소풍을 가자고 했다면…. 더욱이 노란 꽃이 핀 길을, 노란 하늘이 드리워진 길을….”
 “그, 그만 하세요.”
 “후, 무섭습니다. 정말 어떻게 그런….”
 창백한 얼굴 사내 역시 목소리를 내리깔아,
 “만약 말입니다. 그때 내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끝까지 따라갔다면….”
 “그야 당연히….”
 “후우. 상상만 해도….”
 “어떻게 해서 헤어지게 됐다고 했지요?”
 “그렇게 손을 잡고 한참을 걸어갔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금까지 손을 잡고 같이 걷던 그분이 말입니다.”
 “정말 귀신같이 사라지셨군요.”
 “그래 나는 혼자 너무 무서워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내 울음소리에 스스로 놀라 더 크게 울었고요. 그때 누군가 내 몸을 세차게 흔드는 거였어요. 퍼뜩 눈을 떠봤더니….”

 그의 어머니가 울고불고 하며 아들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죽었다고 믿은 자식이 살아나자 집안은 상갓집이 무색하게 웃음이 솟았다.

 “정말 저승은 있는 걸까요?”
 검은 얼굴 사내가 말했다.
 “황천을 보고 노란 꽃을 보았으니….”
 창백한 얼굴 사내가 바람 속에 숨어 짙어 오는 어둠 같은 음색으로 말했다.
 “노란 길을 걸었으니….”
 검은 얼굴 사내가 복창하듯 했다.
 “노란 길을 걸었으니….”
 두 사내 입에서 동시에 운명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노란 길….”
(끝)

독서신문 1391호 [2005.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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