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들의 총합, 필연
우연들의 총합, 필연
  • 이재인
  • 승인 2006.08.1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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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⑬
 

▲ 이재인 (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문화예술의 후원자는 지방자치의 장이 돼야
  생활 속의 문화는 공동체의 장이 얼마만큼의 관심과 정열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기도 한다. 문화란 것이 일단 먹고 살만해야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란 기실 매우 주관적이다. 절대빈곤의 상태도 있겠지만 사실상 현재 우리 사회는 절대빈곤의 경지는 아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지난 시대에 비해 국민들의 문화적 관심이 전에 없이 높은 편이다. 그런 사정에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시설이 서울에 대다수 집중되어 있고, 지방에도 대도시에만 포진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문화라는 것도 경박한 대중문화가 각종 미디어를 이용해 판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안됐지만, 프랑스의 <에밀 졸라 문학관 행사>의 대회장은 항상 프랑스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와서 방명록에 사인을 하고 둘러보고 간다. 그렇지 못한 우리들로서는 그것이 그냥 상징적인 일일 뿐이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에 앞서 부럽기만 하다.

  현재 많은 지방자치단체의 장들이 문화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운영하는 문학관의 경우에는 예산군수와 광시면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에 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주차장 마련을 위해 2001년도에 2500만원을 비롯해 예산문학관 인근에 테마녹지공원 등 1억원 이상의 자금을 들여 공사를 했다.
 이러한 공원조성에 힘입어 문학관 주변에도 이해문, 성찬경 외 14분의 시비공원이 만들어졌다. 이는 이 마을에 문화유적지로 조성되었다. 모두가 지방 자치단체장의 관심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다. 이 분들께 다시금 감사의 뜻을 표한다.

  21세는 흔히 문화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런데도 내가 보기에는 그 문화가 아직 완전하게 자리 잡지는 못한 것 같다. 문화란 말이 매우 넓은 뜻이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시류에 영합하려는 문화는 상업에 가깝지 문화적 토양을 비옥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주5일 근무가 시행되었지만 사람들이 문화적 행위를 하고 문화적 향수를 느끼기보다는 집에서 쉬거나 tv만을 시청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우리를 씁쓸하게 하고 있다. 지친 격무에 쉬는 것도 필요하리라. 그러나 쉬는 시간은 그 자체로 죽은 시간이어서는 안되고 레크리에이션, 재창조의 시간이어야 한다.

▲ 소설가 정미경씨가 박물관을 방문 강연을하고 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활의 숨결을 다시 불어 넣어줄 것 문화를 찾아내서 향유하고 전수해야 한다. 따라서 문화는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고안하고 추진하고 관리하고 홍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누가 하겠는가?
 그런 일을 개인에게 또 독지가에게만 기대하기는 힘들다. 경제인들에게만 요구할 수도 없다. 가장 먼저는 그 고장의 기관장들, 지자체의 장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거꾸로 이번에 문화가 경제를 구축(構築)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파리는 관광수입이 국가경제의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며 여름기간에는 파리를 찾아온 관광객이 지중해 연안으로 피서를 떠난 파리 시민들의 자리를 메운다. 그래서 여름철 파리의 인구는 평소보다 2배 이상 증가한다.
 정주민이 비운 자리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구는 증가한다는 역설이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의 상징이다. 프랑스 뿐이랴.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문화유산 탓에 그들의 부를 살찌운다.

  물론 문화를 너무 경제적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며 문화 자체에도 좋지 못한 태도이다. 그럼에도 경제를 좌시할 수만은 없다. <예산 문학관>을 찾아온 내 손님들을 관찰해 보자. 그들은 이 곳에 와서 근처 식당에서 밥을 사먹는다.
 그리고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지역토산물을 사 가기도 하고 농산물을 구입해 간다. 이렇게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는 결국 그 지방의 살림을 살찌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지방이 풍요로워 질 것을 기대하겠는가? 그렇다고 유흥문화만을 육성할 수만도 없지 않는가? 지방자치단체장들의 문화적 인프라 구축에 대한 관심을 촉구해 본다.
 

 모든 것이 행복이 되고 마는 신비
  돌이켜 생각해보면 집을 짓거나 건축물을 세운 것을 빼놓곤 예산문학관은 거의 다른 분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오늘의 예산 문학관을 만든 것은 8할이 주위 분들의 도움이다. 나머지 2할은 내 노동력이다. 가령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고 거름을 주는 일 등....
 그런데도 혼자 힘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토종꽃을 찾아 심고 가꾸고, 정원을 조성하고, 소독하면서 나는 즐거웠고 또 행복했다. 건강해서 이 뜰을 가꿀 수 있음에 감사했고, 피어난 꽃을 찾아온 벌과 나비도 나에게도 모두 손님들이었고 버스를 타고 가며 그 꽃을 무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고마웠다.
 
 앞으로 더 확충하여 도서실도 만들고 문인집필실과 각종 공연장도 만들고 지역민들에게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개발할 것이다. 이제 돌이켜 보면 고향에 문학관 세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스스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스스로 보상받은 셈이다.

  나의 인생에 후회란 없다. 신앙적 테두리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작은 실수들은 있었지만 결국은 자족할 수가 있었고 늘 감사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실수나 불운도 모두 결국 나 자신을 살찌우고 나의 교만과 부족을 깨닫게 한 것들 뿐 이었다.
 이것은 ‘해석의지’가 아니다. 지난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고 또한 그런 식의 해석을 해야만 내 자신이 편할 것 같아서 하는 인위적 정리, 당위적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 그 자신만이 확실히 아는 느낌, 자기 삶에 대해 자신만이 갖는 느낌들의 총체로서 결국은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했고 행복하다. 
 


나는 배고픔과 독학으로 청춘기를 가로질렀고, 장년기에는 너무도 바빴다. 아이들의 졸업과 입학식에도 참가해 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아내의 병고로 좌절했고 방황도 했고 내 인격의 미흡함으로 오해도 받았고 또 실수도 적지 않았지만 결국 삶은 아직도 내 앞에 이렇게 펼쳐져 있다.
 살아 있음 자체를 온 몸으로 항상 가슴 벅차게 느끼고 있으며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내일 보다 더 나은 오늘 하루를 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오늘이 다시 한 번 주어지는 것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라는 계시로 내게는 해석된다. 
  내 인생이 객관적으로 풍요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항상 풍족했다. 그것은 어쩌면 방글라데시의 국민들이 행복지수 1위를 차지하는 역설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정답이 없는 삶의 문제에서는 주관이 객관을 압도한다.
 자세와 태도가 삶의 질과 방향을 결정하는 아이러니가 바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지금도 피어오르고 있다. 삶은 역설이다. 삶은 어떤 정의(definition)로도 그 자체는 포착하지 못하는 신비로운 것이며 개개인이 채워 넣어야 하는 괄호로 존재한다.

  나는 지금 지방 소도시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기쁘게 가꾼 작은 문학관이 있다. 아들과 딸도 건실하게 자기 길을 걷고 있고 손자들은 나에게 항상 삶의 기쁨을 선사한다. s라인이 아니라 b라인이지만 내 눈에 누구보다 아름다운 나의 늙은 아내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 또한 나는 행복하다.

  인생을 살면서 나를 스쳐간 사람들과 내게 벌어졌던 일을 가만히 되짚어 본다. 가물가물한 인연과 사건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기억조차 아득한 일들도 있고 아직 생생한 일들도 있다. 그럼에도 사소한 만남 하나하나,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가 모두 합쳐서 오늘의 나를 이루고 있고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전부 내 행복의 총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듯’내게 모두 좋은 것들로 채워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나는 소름이 돋는다. 지금 내 삶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그리하여 내 자서전의 제목을 정한다면 <우연들의 총합, 필연>이라고 말하고 싶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메커니즘으로서의 내 개인의 삶. 결국 ‘오래전에 기록된 예언’은 내게도 이루어진 것이고 그래서 ‘기록된 그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할 수 없는(변할 필요가 없는) ‘진리의 말들’이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한 것이리라. 그래서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불평을 말하여도 지혜로운 자의 입은 감사를 발하리로다’라고 한 것이리라. 

  내일 나의 건전지가 소멸되어 멈춘다 하더라도 나는 감사할 수가 있다. 당당하게 아들과 딸과 그리고 손자들에게 ‘나는 그 분 안에서 행복하였네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세상은 ‘너나 잘 하세요!’라고 냉소적으로 말할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한 마디 하고 싶다. ‘모든 것을 행복과 승리의 필연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신비한 믿음체계’에 당신을 조용히, 기꺼운 마음으로 초대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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