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어귀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진실
망각의 어귀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진실
  • 최용석
  • 승인 2008.12.12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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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

▲ 박완서의「그 남자네 집」     © 독서신문
박완서는 자서전 형식의 소설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사십대에 선보인 등단 초기작에서부터 2002년 선보인 단편 「그 남자네 집」(이를 근간으로 2004년 동명의 장편이 발표된다.)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보여준 서사적 풍경에는 망각의 어귀에서 길어 올린 삶의 영상들로 가득 차 있다. 단편 「그 남자네 집」 역시, 우연한 계기로 포착된 희미한 기억의 편린에 기반하고 있다. 이 작품은 한 마디로 애써 잊고 싶은 아픈 체험에 대한 작가의 회고록이라 할 만하다. 그 중심에는 한국 현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참혹한 풍경을 연출시킨 한국전쟁이 자리한다.

한국전쟁은 살아 있는 역사로,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치명적인 고통과 폭력을 안겨준 비극적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전기적 사실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우상적 존재였던 친오빠를 죽음으로 내몬 치명적 사건으로 작가의 뇌리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은 민족적 비극이기 이전에 고통과 한을 안겨준 개인적 참화로 작가의 기억에 남아 있을 법하다. 하지만 현 시점의 개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이해와 무관한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 충격적 사건을 체험했던 사람들조차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전쟁의 아픔을 잊기 위해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서사 담론이 이처럼 사적 체험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독백으로 일관하거나 자기도취에 함몰되지는 않는다. 이런 사실은 작가의 서사적 체험이 불행의 근원으로서의 한국전쟁을 소박하게 재현하거나 고발하는 데 머물지 않는 데서 우선적으로 연유한다. 즉, 작가는 가슴 아픈 사연의 추회를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일깨운다. 한국전쟁에 따른 분단 현실로 빚어진 개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현 시점에서 되돌아보고, 거기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학 세계가 한국전쟁의 암울한 참상에 비추어 삶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성찰적 전망을 제공함을 의미한다. 박완서의 소설이 역사적 체험에서 개인적 성찰을 적극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평은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최근작 「그 남자네 집」은 작중 화자 ‘나’가 후배의 초대로 그의 돈암동 집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후배가 새로 이사한 동네는 바로 ‘나’가 결혼 직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후배의 집 방문을 계기로 ‘나’는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던 ‘그 남자’를 호출하게 된다. 그리하여 희미한 기억에 의지한 채 ‘그 남자의 집’을 찾아 나선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예전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그 동네는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한참을 찾아 헤맨 후에야 ‘나’는 비로소 세월의 풍파에도 초연히 홀로 살아남은 ‘그 남자의 집’을 발견해 낸다.

마당 가득한 나무들을 위엄 있게 거느리고 옛 자태를 간직하고 있는 ‘조선기와의 한옥’을 접하면서 ‘나’는, ‘그 무성한 그늘에서 관옥(冠玉)같이 아름다운 청년의 단 꿈’을 본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전쟁 후에도 변함이 없는 ‘그 남자의 집’은 망각의 어귀에서 서성이던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을 역사적 사건과 함께 불러낸 것이다.

‘그 남자’는 학창시절 같은 동네로 이사 온, 어머니의 먼 친척이다. 고등학교 시절, 서로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등굣길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눈길 한번 주지 못했던 터라 ‘나’는 대학교에 입학만 하면 그를 마음껏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 날을 기대한다. 하지만 가슴 두근대던 대학 신입생 시절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그 남자’는 국군이 되어 전장으로 향하고, 서울에 남은 ‘나’는 살기 위해 미군부대에 취직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국군에 징집되어 상이용사 처분을 받았으나 겉은 멀쩡한 ‘그 남자’와 ‘나’는 재회한다. 전쟁 중 형과 가족들이 월북하자 노모와 단 둘이 서울에 남게 된 ‘그 남자’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노모를 괴롭혀 용돈을 얻어내고, 의사인 누나에게도 손을 벌린다. 그가 돈을 구하러 서울을 비울 때마다 ‘나’는 그가 없는 공허감에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박한 심경에 사로잡힌다. 그건 열정적인 사랑의 감정일 수 있다. ‘그 남자’ 없이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나’는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결혼상대로 택한다. 서로 붙잡고 목 놓아 울지만 ‘나’는 그것이 결코 ‘그 남자’와 헤어지기 싫어서가 아님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왜 그토록 쉽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남자를 택할 수 있었는지 진정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새들의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그 정황을 이해하게 된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암컷은 수컷이 지은 둥지를 기준으로 자신의 짝을 선택한다. 당시 ‘나’나 ‘그 남자’ 모두 사방에 비가 새고 금이 가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허름한 집에서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한 ‘나’ 역시, 작아도 좋으니 안전한 집에서 편안하게 자녀를 기르며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삶이 새의 차원, 즉 동물적 차원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나’가 새삼스레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부끄러움의 이면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고결하고 선량하며 동정심을 잃지 않는 삶에 대한 작가의 바람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 남자의 집을 찾아 헤매는 ‘나’의 행위는 잊고 살아가던 기억의 파편을 맞추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작품명 ‘그 남자의 집’은 전쟁의 아픔과 고통이 스며있는 장소인 동시에 삶의 항구적인 가치를 일깨우는 공간임을 깨달을 수 있다. ‘나’가 겨우 찾아낸 그 남자의 집이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이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장면에서도 이런 사실을 암시 받을 수 있다.

역사라는 거대한 폭력적 현실에서 개인의 소중한 가치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전쟁이 휩쓸고 간 상흔 속에서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오직 살아남기에만 골몰했던 당대인에게 사랑은 사치나 다를 바 없는 소모적인 감정일 수 있다. 생존조차 보장 받기 힘든 시절에는 상대를 배려하거나 온정을 베푸는 일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가족을 위한 안전한 경제적인 둥지가 더 절실할 수 있다. 작중의 ‘나’ 역시 황폐화된 현실에 직면하여 사랑의 감정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택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원초적 욕망에 속하는 사랑에의 욕구마저도 쉽게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전쟁의 폭력성이 치명적인 것임을 일깨우기도 한다. 따라서 ‘나’의 이런 인식은 물질적 탐욕에 앞서 전쟁의 폭력성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나’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그 선택을 신중하고 사려 깊은 판단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살아남은 것 그 자체를 고통으로 여기고 수치심을 느끼도록 이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피로 얼룩진 시대의 아픔을 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이 내딛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주검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임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젊은 날의 아픈 사랑이 옛 추억이란 이름으로 되살아난 ‘그 남자’에 대한 ‘나’의 기억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지만 잊은 채 살아가는 기억을 일깨운다. 그러니까 작가는 망각의 어귀에서 건져 올린 기억을 빌려서 분명 존재했던 것, 아직도 존재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잊어서는 안 될 삶의 진정성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작가는 소설의 형식을 통해 가치 있는 삶의 태도와 관련하여 독자와의 소통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 진솔한 이야기가 허공에 부딪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하겠다.

/ 최용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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