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耳順)의 마라토너
이순(耳順)의 마라토너
  • 관리자
  • 승인 2006.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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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애가 현관에 서서 준비 다 되었냐며 재촉을 한다.
“그래, 곧 나갈게.”
대답은 했지만 자꾸 긴장과 기대감 속에 가슴이 설렌다.
아침 일찍 서둘러 도착한 곳은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이었다.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전국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많은 시민들로 공원이 가득 차있다.
초가을 햇빛 속에 한강변 광장에 함께 있고 보니, 문득 초등학교시절 운동회 때의 일이 떠올랐다. 한 달 전부터 달력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가면서 손꼽아 기다렸던 운동회.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을 싸달라고 어머니께 졸랐었던 기억….

 운동장엔 만국기가 펄럭이고 스피커에선 행진곡이 우렁찬데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뽐내며 달리던 그 설레임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커다란 번호표를 단 유니폼을 입고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얼마 전 둘째딸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했었다. 그때 선뜻 결정을 못하고 망설였던 것은 ‘지금 이 나이에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딸애는 여러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마라톤대회에 곧잘 나가곤 한다. 목표를 두고 이루어낸 자기 성취감에 여간 흐뭇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 부럽기도 해 용기를 내어 도전하게 된 것이다.
이제 마라톤은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국민운동으로 점점 정착되어가고 있다. 달리는 사람의 연령과 체력에 맞추어 적정 수준의 거리를 정해 달리면 되니 꼭 부담이 덜어져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는 것 같다. 42.195km의 풀코스에서 20km의 하프 코스뿐만 아니라 10km, 5km 코스도 있다.

 초보인 나는 5km 건강 달리기에 도전했다.
잠시 후,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하늘을 향해 울려 퍼졌다. 순간 달릴 준비를 하고 있던 선수들은 일제히 ‘와’하는 함성을 울리며 달려 나갔다.
선수들의 발걸음 소리에 맞춰서 내 심장도 뛰기 시작했다.
수십 년 만에 느끼는 흥분된 기분이었다.
그동안 나는 3개월이 넘도록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 안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날마다 5km를 완주하기 위한 체력훈련을 쌓았다. 주말에는 집 근처의 한강변을 따라 딸애와 실전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장거리 달리기는 들이쉬는 숨보다 내쉬는 숨을 잘 해야 편한 호흡을 유지할 수 있어 숨 쉬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처음부터 내 페이스에 맞게 나보다 앞서 달리는 선수들과 비교하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칠십이 훨씬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꼿꼿한 자세로 내 옆을 지나가신다. 그 옆으로 비만과 싸우고 있는 듯한 젊은 청년이 땀을 뻘뻘 흘리며 뛰다가 속도를 늦춰 걷기를 반복하며 나간다. 앞에서는 맹인안내견의 도움을 받으며 뛰어가는 시각 장애인도 보인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내 뒤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의 포함된 4명의 일가족이 웃음소리를 날리며 뛰어오고 있어서였다.

 한참을 달리다, 문득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을까. 또 ’얼마나 더 가야 할까’하는 궁금증이 들어 눈을 들어 멀리 보니, 그 많던 사람들은 온 데 간 데 없고 딸애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리를 잃고 혼자 떨어진 기러기처럼 텅 빈 곳에서 혼자 뛰고 있었다. 젊었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발걸음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포기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는 않았다. 어금니를 다부지게 물었다. 
뛰는 모습은 다르지만, 목적과 의미를 다지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밟아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종착점을 향해 뛰면서 일종의 동료애 같은 것을 느껴보려 애를 썼다.
제각각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힘든 고행 같은 수고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 자신을 추스르고 있는 그들, 그런 모습을 보자 나도 저절로 힘이 났다.
 

  마라톤은 무엇보다도 정직한 운동이다. 초반에 무리해서 오버페이스를 하면 곧 지쳐버려 도중하차하기 쉽고, 반환점을 돌지 않고 중간에 되돌아오면 실격 처리될 수밖에 없다. 욕심 부리지 않고 꾸준히 달려 결승점까지 달려오는 사람만이 진정한 승자로서 인정받는 경기가 바로 마라톤이다. 사실상 인생살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의 능력이나 형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고,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무리해서 형편이 좀 더 나은 사람들의 뒤를 쫓는 일에 급급하다보면 오히려 패가망신하는 꼴이 되고 만다. 불필요한 욕심 부리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차곡차곡 행복을 만들어가는 사람만이 인생에서도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 
이순의 이른 나이인데다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젊은이들 사이에서 뛴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나는 앞으로도 나를 탁마할 고삐를 늦추지 않으려 한다. 어떻든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이번 출전의 결실이었고 보람이었다.
난 지금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어느덧 결승점이 보인다. 두 다리는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풀려져 있고, 숨은 턱까지 차서 호흡도 곤란하다. 주위에서 힘내라는 시민들의 응원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다리에 힘이 다시 솟아오르기를 기대하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더욱 힘차게 뛰었다.
드디어 골인.
야! 나도 해냈구나!
어디선가 딸애가 뛰어와서 나를 부둥켜안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성취감과 자신감이 내 마음에 그득 차오름을 실감해서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완주 메달을 목에 건 채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당신 큰일 해냈어”
하며 격려를 한다.
“우리 엄마 대단해”
하며 아이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유서정

수필가. 문학마을을 통해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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