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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내가 사는 비슬산 동남쪽 사면에도 수묵의 그늘이 깊다. 한동안 대견봉에서 조화봉을 잇는 능선을 바장이던 단풍이 아래쪽으로 앙감질을 시작한다. 붉나무가 안달하는 너덜겅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세속에 찌든 몸비듬을 털어내기에는 이맘때가 좋다. 그럴라치면 어김없이 전화가 온다. 그렇다고 어디 온천장이나 돌밭으로 나가자는 얘기도 아니고, 예의 놀판을 벌일 궁리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또 하룻밤 벗겨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패당은 쉬 이루어진다. 시하고 그림이 만나면 그뿐, 어떤 수사도 형용도 다 부질없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즐겨 나무젓가락을 든다. 우동 그릇이나 자장면 그릇에 딸려온 그것이면 족하다. 거기다 먹물을 찍어 쓴다.
괴발개발, 말 그대로 고양이발 개발이 마구 삐댄 꼴이다. 격조는 언감생심이고, 그저 하찮은 야취나 좇을 따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이른바 ‘나무젓가락체(木箸體)’다.
그 가운데 하나를 내보인다. 먹물이 좀 남았기로 오랜 날을 붙들고 온 ‘엮음 愁心歌’ 한 자락을 옮겨 쓴 것이다. 웬만큼은 끝이 모지라진 나무젓가락이 내는 마르고 거친 맛. 대저 수심가의 표정이란 그런 것이려니 싶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일 테지만. “사는 게 별거 있간디 모시 고르다 베 고르는 게지.”
박 기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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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제8회 고산문학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대구시조문학상, 오늘의 시조문학상 등 수상
작품: 『키작은 나귀타고』, 『默言集』, 『비단 헝겊』, 『하늘에 밑줄이나 긋고』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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