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②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②
  • 신금자
  • 승인 2008.10.2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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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의 여인들 23회

▲ 신금자[수필가·본지 편집위원]     ©독서신문
모차르트, 미완성 진혼곡 그 너머의 세상으로 떠나다


1791년 12월 5일 그의 남편인 모차르트가 숨을 거두었다. 미완성의 레퀴엠은 정말 모차르트의 숨통을 조였던 것일까. 모차르트는 아버지를 여윈 상실감이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컸다.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늘 든든한 스승이자 후원자였기에 더 그렇다. 하필이면 모차르트가 아버지의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해 폐인처럼 나뒹굴 때 발제크 슈투파흐 백작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 백작은 자기 아내의 사망1주기추모를 위한 진혼곡 ‘레퀴엠’을 의뢰했다. 그런데 그 레퀴엠은 검은 코트를 걸친 아버지의 유령처럼 모차르트를 붙들고 괴롭혔다. 심신이 허약해진 그는 작곡을 하는 내내 여기저기 혼령에 이끌려 다니다 쓰러졌다. 그렇잖아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산 자와 죽은 자의 혼란 속에 갇혀 혼미한 그가 진혼곡을 작곡하면서 점점 그 사념에 빠져들어 고통 받았으리라. 끝내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주검이 되었다.

 
마지막 겨울, 비바람에 에이는 슬픔

그 해 빈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 변덕스러웠다. 겨울해가 짧은 데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비와 진눈깨비, 눈이 번갈아 내렸다. 콘스탄체는 몸져눕고 몇 명의 친구들만 마차를 따랐다. 그들마저 생 마르크스 공동묘지 입구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상여꾼들에게 저지당해 묘지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렇듯, 유족이나 지인들 중 누구하나 입회하지 않은 채 모차르트는 공동묘지 인부들에 의해 대여섯 구의 행려병자시신과 함께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내던져졌다. 이 공동묘지란 것이 참으로 야속했다.
 
모차르트는 말년에 힘든 가계를 꾸렸기에 그의 시신은 12월의 삭풍과 함께 그렇게 묻혔다. 하필이면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린 그 슈테판 성당에서 간단한 장례식을 치렀다. 모차르트가 진혼곡 ‘레퀴엠’을 미완성시킨 것은 바로 요절하게 될 자신을 위한 미련이었을까. 이 세상을 하직하리란 위대한 음악가의 마지막 여운 말이다. 숨을 거둔 지 하루 만에 치룬 장례였으니 진혼곡의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을 시각이 아닌가. 그가 진짜 진혼곡을 위해 친히 그 너머에까지 한없이 체득하다 그리되었을까? 사뭇, 돌아보지 않고 간 그가 콘스탄체에게 참혹한 시련을 주었다. 당장 어린 두 아들과 거리에 내몰리게 된 콘스탄체의 신세가 참으로 딱하다. 

그날 공동묘지는 앞을 볼 수 없으리만치 안개가 잔뜩 끼었다고 했다. 그 하늘의 심사를 좀 알 것도 같다. 이 쓸쓸하고 비참한 광경을 누가 볼세라 안개로 장막을 치고 하늘도 노심초사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망설인 끝에 마구 비를 퍼부었다. 갑작스런 비바람으로 인부들도 급히 내려오는 바람에 그가 묻힌 장소는 더더욱 오리무중이 되었다.

빈 시민들은 모차르트를 그렇게 보냈다.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무심했다. 그러다 모차르트가 떠난 지 60년이 지나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러나 공동묘지에 이름도 없이 묻혔으니 어떻게 그를 찾을 수 있으리. 때늦은 감이 있어도 공동묘지 인부들을 데려다 대충 더듬어서 천사 조각상이 달린 묘비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껏 시에서 밀려드는 관광객을 호도한다. 그 흔한 묘비명도 없고 그 옆에 어린 천사의 표정이 갸우뚱한 게 좀 그렇지만 요절한 천재의 묘지이기를 애써 바랄 뿐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처사를 18세기 빈 사람들은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생전에 돈도 명예도 없이 그 영광을 누릴 후손도 남기지 못하고 떠났기에 더 애석하다. 콘스탄체는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다. 그러나 당시 영아 사망률이 60%였으니 겨우 아들 둘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운 좋게 살아남은 두 아들에게 자식이 없었다. 결국 모차르트 가문은 그 아들 대에서 끊기고 말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에 모차르트의 후손은 없다. 비록 자신을 돌보지 않은 행복하지 못한 일생이었지만 인류에게는 영원한 행복을 남겨준 그였다.

<모차르트 평전>의 작가 필립 솔레르스는 그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신은 우리에게 그를 보내주었다가 다시 데려갔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자격이 없었지만 그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불멸의 사랑은 불후의 명곡을 남기고

모차르트는 두 여자를 사랑했는데 콘스탄체의 언니 알로이지아로부터 실연을 당했다. 이에 동생이자 아내가 된 콘스탄체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이다. 사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 결혼 후 안정적으로 작곡에 매달렸다. 그리고 연주회도 활발히 가졌다.

모차르트는 스스로 ‘사랑받고 있는가?’에도 매우 민감했다. 그 때문에 종종 관중석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저를 사랑하세요?” 하고 물어보곤 했다한다. 한 번은 친지가 장난으로 “아니”라고 대답하자 어린 모차르트는 눈물을 글썽인 적도 있다한다. 예컨대 아버지에게 쓴 편지 말미에 “사랑하는 아버님께 천 번의 입맞춤을 보냅니다.” 아내 콘스탄체에게도 “백만 번, 십억 번” 이런 식이다. 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니 세간의 이야기대로 콘스탄체가 악녀였다면 그는 지쳐서 행복한 느낌으로 작곡과 연주를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적인 작곡가들이 뛰어난 명곡을 작곡한 배경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어왔다. 어쩌면 그 사랑에서 비롯된 고통도 필연적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으로 모차르트가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음악을 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35년의 짧은 생애에 600여 곡을 작곡한 모차르트의 천재적 음악성은 그의 요절에도 아랑곳 않고 살아 있다. 모든 인류의 가슴 속에 그대로 흐르고 있다. 그 지난한 가난 속에서 동고동락한 콘스탄체에게도 애정어린 시선이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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