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원형을 찾아 떠나는 환상 여행
삶의 원형을 찾아 떠나는 환상 여행
  • 독서신문
  • 승인 2008.10.1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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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명의 「나비의 전설」
▲ 『나비의 전설』 표지     © 독서신문
일상이 공허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느껴질수록 그 일탈의 욕망은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대개의 경우 그 욕망이 일상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간혹 자신의 존재의미를 탐색하는 구도적 차원에서 추구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반응은 공통적으로 현실을 향한 애착이나 집착을 바탕에 두고 있다.

윤후명의 서사적 동인(動因)은 바로 ‘일상에의 일탈 욕망’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작중 화자가 삶의 원형을 발견하기 위해 낯선 곳을 혼자 방문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윤후명의 서사에서 ‘떠남’의 의미망이 각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관념의 유토피아적 환상 세계의 통로를 모색하는 힘겨운 몸짓이다. 여행 도중 보이는 작중 화자의 낯선 여인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의미망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떠남’에 관한 내용은 유희적 관념에 바탕을 둔 환상적 이미지로 그려진다. 환상적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이상과 현실의 불화로 인해 연출되는 것인 만큼 일상과 연관한 작가의 인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종종 미래적 전망에 대한 작가의 뚜렷한 신념이나 지식이 결여된 데서 기인하기도 한다.

윤후명의 환상적 이미지는 현실 저 너머에 존재하는 삶의 원형을 우회적으로 일깨우는 매개적 존재로서의 의미가 강해 보인다. 도시적 감수성과 유려한 문체에 힘입어 선명한 의미망을 지닌 환상적 이미지는 ‘작가의 문학적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시적 분위기에 힘입은 환상적 이미지의 교묘한 연출은 소설 창작에만 전념한 1980년대 이후에도 한결같이 작품이 신선하다는, 문체에 대한 평을 이끌어낸 원천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삶의 구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떠남’과 삶의 원형을 일깨우는 환상적 이미지의 연출은 윤후명 문학의 몸체를 떠받치는 두 건각(健脚)으로 볼 수 있다. 「나비의 전설」은 윤후명 문학의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지갑을 잃어버린 화자인 ‘나’는 주민등록증을 재발급 받기 위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교외의 면사무소에 들른다. 그 곳 면사무소에서 일을 마친 후, 열차 출발 시각까지 너무 많이 남겨진 시간을 메우기 위해 목적지 없이 발길 닿는 곳으로 길을 나선다. 뜻밖에 맞닥뜨린 환상적 이미지를 연출하는 검은 나비 떼의 출현에 ‘나’는 걸음을 멈춘다. 택시 속에서 본 검은 나비 떼는 용문사라는 절에 내린 ‘나’의 눈앞에 더욱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선다.

택시에서 내려서야 나는 입구의 기둥에 씌어 있는 절 이름을 읽었다. 그리고 그곳에도 여전히 어지럽게 날고 있는 그것들이 나비라는 사실을 비로소 확인했다. 그렇게 많은 나비 떼가 과연 이 세상에 있을 것인가. 나는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와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이 세상의 일이었다. 나비 떼는 계속 날아오르고 있었다.

경이로움과 신비스러움 그 자체인 검은 나비 떼는 ‘나’를 비인(非人)의 세계로 초대한다. 상경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나비를 둘러싼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나’의 이런 기이하고 환상적인 체험은 바쁜 일상에 밀려 꿈속의 일처럼 기억 저편에 자리하게 된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일 년 전 검은 나비 떼가 출현한 그 장소에 재차 들르게 된다. 
 
지난 한 해 동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들이 전람회의 그림처럼 지나갔으나, 정작 내가 겪은 일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러자 지나간 몇 십 년이 시간도 모호하기만 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이 세상의 풍경인가. 도저히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는 지난해보다 훨씬 더 환상 속으로 빠져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이며,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내심 ‘나비 떼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나비 떼를 볼 수 없다면 다시금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돼, 그것도 나름대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나비 떼가 이상하게도 내 삶의 의미를 뒤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등 삶을 둘러싼 본질적인 의문으로 혼란스러웠던 순간을 새록새록 일깨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은 나비 떼는 일 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의 눈앞에 등장한다. 이후, 일 년 전에 들린 식당에서 다시 된장찌개를 시키고 담배를 피우다 문득 한 소녀를 본 순간, ‘나’는 불현듯 나비의 영상을 떠올리게 된다. 동시에 비루한 일상을 피해 무작정 떠난 몽골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소녀의 모습도 겹쳐 등장한다. 

나비는 죽은 사람의 넋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아니었다. 나비는 죽은 사람의 넋이 아니었다. 만약에 환생이라는 게 있는 것이라면 나비는 소녀였고, 소녀는 나비였다. 나는 홀린 듯 소녀를 바라보았다. 초원으로 나를 이끌고 있는 몽골 소녀와 수박 쟁반을 들고 내게로 오고 있는 나빌레는 같은 소녀였다. 나는 내 머리가 뒤죽박죽되었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이 나비 떼가 내게 준 환각의 병증이라 할지라도, 나는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화려한 외양을 지닌 나비의 존재는 외부의 작은 충격에도 몸이 쉽게 부서지며, 죽으면 쉽게 분해되어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화석으로 남는 일이 드물다 한다. 여기서 나비의 상징적 의미는 분명해진다. 화려함과 연약함과 순수성과 순간성이 그것이다. 이런 나비의 존재가 ‘나빌레’라는 이름의 식당 소녀와 몽골 여행지에서의 소녀와 어린 시절의 죽은 여자 친구의 존재와 함께 ‘나’에게 동일한 의미망으로 다가선 것이다. 그것은 이들 존재가 시공을 초월하는 환생의 고리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즉 나비가 곧 ‘나빌레 소녀’이고, ‘나빌레 소녀’가 ‘몽골 소녀’이며, 몽골 소녀가 곧 죽은 여자 친구인 것이다.

나비가 좋아 그 출현 장소에 음식점을 차렸고, 그 인연으로 포대기에 싸여 버려진 여아, 즉 ‘나빌레’를 만나면서 삶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는 식당 주인의 이야기는 인연으로 얽힌 삶의 단면을 새삼스레 일깨운다. 그런가 하면 반복되는 일상으로 무기력에 빠진 ‘나’는 막연히 몽골 여행길에 나서는데, 그 곳에서 한 몽골 소녀를 만난다. 그런데 그녀는 옛날 이웃에 살던 죽은 여자 친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상하게도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렇다면 나비 떼로 인해 혼몽과 혼란으로 혼탁해진 ‘나’의 정서를 맑고 차분하게 이끈 ‘나빌레 소녀’와의 만남의 의미망은 이제 밝힐 수 있을 듯싶다. 그러니까 ‘나’는 ‘나빌레 소녀’와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삶의 원형 혹은 실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나’가 ‘너’일 수 있고, ‘너’가 ‘나’일 수 있는 윤회적인 삶이 그것이다. 달리 말해, 작중의 ‘나’는 주체와 타자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혹은 주체와 타자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사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연약함과 순진무구성과 낭만적인 꿈과 정열 또는 성장기의 시련과 아픔의 범주에 그 의미망이 머물고 있는 기존의 나비 모티프와 달리 윤후명의 나비 모티프가 고유하고 참신한 의미망의 창출을 통해 개성 있는 서사적 영역을 새로이 열어 보인다는 평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
 

/ 최용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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