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 접근을 허용하는 텍스트
주관적 접근을 허용하는 텍스트
  • 황인술
  • 승인 2008.10.13 14: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선생 논술교실 60
▲ 리쾨르(paul ricoeur)     © 독서신문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


프랑스의 철학자,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에게 철학과 신학을 배웠으며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여기서 현상학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밝히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파리대학에서 공부했고 1950년 후설의 『현상학의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현상학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밝히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상징언어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너무 좁다고 여겨,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1975년에 『살아 있는 메타포』를, 1983 ·1984·1985년에 연이어서 『시간과 이야기』를 펴냈다. 1990년에는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1992년에는 대표적인 논문을 모아놓은 『강좌』를 출간했다.
 

해석학과 기호학의 사이에서

- 그레마스에게 바침

왜, 사람들은 설명과 이해의 차이를 간직하려는 것일까? 이와 같은 구분이 어떻게 기호학과 해석학의 토론과 더불어 변증법적 양상을 띄는가를 보다 전문적으로 보여주기 전에 나는 간단한 예를 들어 이 구분의 넘어설 수 없는 특징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와 같은 예들은, 이해적 지배의 해석학과 설명적 지배의 해석학이 대립되고 다시 교차하는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나로 하여금 연속적으로 세 개의 문턱을 차례로 넘어가게 한다.

 
첫 번째 문턱 : 행동. 이 첫 번째 문턱을 넘어서면 이해는 표출, 교감, 혹은 생소한 생명에로의 전이 등의 문제가 되는 개념들에 근거한다. 내가 든 예는 단순한 사건과 경우들과는 구분되는 행동의 예이다. 우리는 ‘왜?’라는 물음에 일종의 답변, 즉 ‘그 이유는’따위의 절이 선행하는 원인이 (규칙적인 결과로 이해되는 원인의 인간적 의미에서) 아닌 ‘…의 이유’를 의미하는 답변을 줄 때 하나의 행동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의 이유’라는 범주에 준거하는 것은 반드시 지향적 장(le champ intentionnel)을 합리성의 모델에 귀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 합리성이 도구적이건, 전략적이건, 도덕적이건 말이다. 그 이유는 욕망가능성의 특징에 의해서, 즉 무엇인가가 누군가에 의해서 무엇으로서 갈망되느냐를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다른 것들에 의한 정체파악이 가능한 특질에 의한 동기부여의 장 속에 욕망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 무엇인가로서’는 ‘…의 이유’이다. 이 같은 기본 예에서 이해는 바로 일정한 설명과 구분된다. 즉 물리적 인과율 설명과 말이다. 그러나 모든 일체의 설명과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왜?’라는 물음에 답하지 않고서는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유 차원의 설명은 비록 그것이 동기적 원인과 선행하는 물리적 원인을 대립한다고 해도 하나의 설명이다. ‘…의 이유’라는 차원의 설명은 행동의 객관화된 결과로부터 행동하는 주체들의 주도권 속에서 그 것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이해의 길이다. 그것은 이해로 하여금 사람들이 지향이라 부르는 정신적 실재와 일치하려는 것을 면제 시켜준다. 이해는 지향의 구두(혹은 말없는) 선언 속에서 지향을 파악 한다. 설명을 통한 이해는 따라서 이 같은 이해의 전개과정이며, 이 같은 이해는 출발부터 욕망가능성의 특징의 ‘그 무엇으로서’를 포함한다. -(후략)-

 
두 번째 문턱 : 일상적 서사물. 이 같은 이해에서, 행동의 가장 가까운 곳까지 물음과 답변의 교환 속에서 우리는 쉽게 서사물로 넘어간다. 그때부터 이야기의 연쇄는 명백하지 않고, 공통행동에 대한 각자의 공헌은 잘못 경계가 그어졌고, 주인공들을 대립시키는 경쟁과 투쟁은 은폐된 채로 남아 있다. 초반에는 흩어진 사실들과 표면적으로는 오류적인 행동양식, 말없는 흔적들, 해독되지 않는 사료들만을 갖는다. 그 임무는 따라서 조형적으로 다양한 주체들의 상황과, 지향, 개입, 전략들을, 적대적 혹은 우호적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구상화하는 것이다. 이때 원조자의 도움이나 대립자의 족쇄를 참작해야 한다. 그 같은 행동의 구상화를 재파악하기 위한 특권화 된 중개는 바로 서사물이다. 서사물은 이렇듯 행동의 활성 그 자체 속에 있으며, 의미작용, 최소한 모든 복합적 의미작용의 첫 번째 시련이다. 문제의 관건은, 행동의 영역이 잘려나간 문학적 서사물이 아니라, 일상의 활동과정에 스며있는 대화의 실타래에 속하는 서사물이 문제가 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일상적 서사물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픽션 서사물의 미래적 특징은 일탈 속에서 예고되며, 그 일탈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행동과 서사물 사이에서 그 거리는 벌어져간다. 바로 이 같은 서사물에 대해서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그것은 행동의 주체를 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누구는 그 ‘무엇’과 ‘왜?’와 분리가 되지 않는다. 행동과 서사물 사이에서 탄생하는 이 같은 일탈을 위해서 이해는 행동의 과정 그 자체와 구분되는 상상적 도식의 생산 속에 있다. 이 술어가 갖는 문학 이전의 의미에서는, 모방적 표상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이해적 재구성으로서 행동도식, 이야기된 사건들에 어느 정도 적합한, 그러나 그것과는 구분되는 실제적 모델을 상상력으로서 산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는 문학적 픽션이 아니라, 이미 도식의 생산적 상상력의 사용이며, 방금 전의 단순한 지향적 행동에 대해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언어 속에서 선언되고, 공적인 검토에 제공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후략)-

 
세 번째 문턱 : 문학적 서사물. 나는 문학적이란 말을 그것의 엄밀한 의미에서 취한다. 즉, 철자와 문자에 국한된 담화가 그 정의이다. 픽션 서사물과 역사적 서사물은 두 개의 대표적인 변이형이며, 각각은 -특히 픽션 서사물 - 신화, 민속학, 서사시, 고전비극에서 시작해 근·현대 소설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변이형들을 갖고 있다. 문학적 서사물은, 그것이 대화의 매개를 통한 사회적 타협과 뒤섞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회생활로부터 떨어져 구분되는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서 일상적 서사물과 차이가 난다. 이때 그 영역의 울타리는 문학과 생명의 관계에 대한 상호텍스트성의 관계에 부여된 1차성에 의해서 설명된다. 문학성의 개념이 표현하는 거리두기는 그렇지만 이야기가 간접적으로 하나의 실천적 모방, 즉 행동에 준거를 두는 모방적 조작으로 남아 있는 것을 저지하지 못한다. 이 같은 간접적 관계는 서술행위 속에서 은거하거니와 서술행위란 서술자와 피 서술자의 교환의 사회적 방식이다. 고독한 독서는 오늘날 서사적 혹은 비극적 서술의 축제적 수용을 대신한다. 따라서 만약, 실천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극한까지 이완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방법론적으로 괄호 속에 들어간 채로, 그리고 문학비평은 텍스트의 울타리 속에 자리잡은 채,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란 이름 아래 지칭하고, 여전히 청자에 대해 시행된 의미의 파급 속에 있는 지시체적 관계를 비 변별적인 것으로 고려한다. 이 같은 폐쇄성의 전제조건에서 이해가 갖는 특별히 문화적인 양태성은 그 빛을 본다. 그것의 대상은 서사물의 구상화 그 자체이며, 내가 그것의 재구상화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과 분리되는 구상화이다. 카타르시스는 그 같은 양태성의 하나이다. -중략-

서술적 지성은 따라서 이른바 의식의 혼합 혹은 정서적 융합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텍스트 속에 투자된 구상적 조작들에 근거한다. 구조화의 유기적 성질이 문제가 되건, 불일치적 일치의 놀이가 문제가 되건, 혹은 설정된 정형과 관련해서 일치성과 혁신 사이의 놀이가 문제가 되건 (이 같은 서술적 지성은 바로 하나의 서술학적 지성이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시간과 장소에서 산출된 서술적 작품의 폭넓은 선집을 통해서 교육될 때, 높은 수준의 교양의 정표가 될 수 있다. 이 같은 지성으로부터 특수한 정념들이 나오며, 이 정념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볼거리에 의해서 순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순화는 -그것의 치료상의 혹은 신비적인 구성성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야기의 지성적 이해에 의해서 이 같은 정념을 자체의 명증화에 있다. - 출처 : 김성도, 『작가세계』통권 제26호 1995년 8월호 

 
논제

▲ 황인술 교수     ©독서신문
리쾨르는 텍스트를 ‘기록에 의해 고정된 담론’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건으로 담론이 기록에 의해 고정될 때,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로부터, 원래의 청자로부터, 그리고 원래의 명시적 지시체로부터 ‘의미론적 자율성(semantic autonomy)’을 얻는다. 씌어진 글은 ‘진술자의 의미’와 ‘진술된 의미’가 더 이상 일치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기록에 의해 저자의 주관적 의도와 텍스트의 객관적 의미 사이에 간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텍스트 의미는 글로 구성되어진 상태 그대로 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발신(저자)하는 사람의 의도가 수신자(독자)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텍스트를 말한다. 이것은 현대 해석학에서 개념화된 용어 중 하나로 중요한 사고의 바탕이 되는 정의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텍스트 -성전, 교과서- 등과 구별되는 해석의 자유와 주관적 접근을 허용하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텍스트에 대한 의미를 정리하여 쓰시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