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 신금자
  • 승인 2008.10.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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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의 여인들 22회
▲ 신금자[수필가·본지 편집위원]     ©독서신문
 
추운 날에는 탱고를!

오선지에 새까맣게 걸려있는 악보만 보아도 지레 겁먹는 필자의 클래식 취향은 좀 의외다. 은밀히 말하면 클래식 음악가들의 천재적 재능에 대한 부러움이다. 그들이 평소 무대가 아닌 사생활에서 보이는 기질은 참으로 유별나다. 괴팍하고 난잡하기 이를 데없다. 모차르트도 예의 그런 사람이다. 그는 절대 예의란 것이 없고 경박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녔다.
 
허나 음악을 하는 무대에서는 전혀 딴사람이 된다. 그 신들린 영감은 어디서 오는가. 그의 영화 '아마데우스' 에서도 평상시의 그와 악상을 떠올리는 그는 사뭇 다르다.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줄곧 나쁜여자로 나온다. 천박하고 낭비벽이 심한 나쁜 여자로 말이다. 콘스탄체를 누구나 악처로 기억하는 이유다. 모차르트의 말년이 궁핍했던 탓을 그녀가 다 안고 가는 셈이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힘든 시절을 잘 헤려보면 그녀에게 너무 덤터기를 씌운다는 생각이 든다. 슬쩍 그녀만의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방식을 엿보고 싶었다. 다행히 그녀의 행실이 나쁘다고 할만한 그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모차르트의 벌이가 시원찮았을 때 투정보다 고통을 함께 했던 것 같다. 이들이 경제적 감각이 없어 빚더미에 깔릴 지경이었지만 부부애는 남달랐다. 아주 추운 겨울날 난로에 넣을 장작이 없었을 때에도 부부가 밤새 껴안고 춤을 추며 한기를 이겨냈다고 한다. 그리고 9년 동안의 결혼생활에 자녀를 여섯이나 낳을 정도였으니 부부 금슬도 좋았다고 보아진다.

그러면 왜 인정해주는 유명한 작곡가였던 모차르트가 이렇게 돈에 허덕여야 했을까?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고정 수입이 아닌, 후원금이나 공연이 있을 때만 수입이 생겼기 때문이다. 궁정 소속이었을 때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당대에 빈의 궁정 음악가들이 벌인 음모에 모차르트는 번번이 일자리를 잃었다. 모차르트의 천재적 음악성을 두려워한 음악가들에 의해서였다. 또 하나는 콘스탄체가 여섯 명의 아이를 낳으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콘스탄체의 온천행 요양이 잦아 치료비와 약값 등에 많은 돈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숙생인 모차르트를 만나다

콘스탄체의 어머니 베버 씨는 빈에서 하숙집을 운영했다. 베버 부인은 딸 넷을 두었다. 모차르트가 연주 여행으로 빈에 왔을 때 베버 부인의 큰딸이자 콘스탄체의 언니인 오페라 가수 알로이지아 베버를 알게 되었다. 음악 연주를 할 때면 필히 오페라 가수가 있어야 했는데 이를 알로이지아가 곧잘 했다. 모차르트의 곡을 제일 잘 소화했기에 모차르트도 늘 만족해했다. 이로 인해 알로이지아와 좋은 감정을 키웠고 결국 모차르트는 그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알로이지아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모차르트를 외면하고 돈 많은 희극배우 랭의 후처로 들어간다.

1781년 5월, 모차르트는 빈에다 하숙집을 구했다. 고향 잘츠부르크를 아주 떠나온 것이다. 모차르트가 채인 알로이지아의 집이었지만 그전부터 알던 곳이라 그리 정했다. 예견된 일이었을까. 모차르트는 다시 시집간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탄체를 사랑하게 된다.

그 해 12월,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다. 네 딸 중 3명의 딸을 묘사할 땐 천박하고, 불성실하고, 심술궂고, 바람둥이 기질에다 천방지축이란 평을 하던 그가 콘스탄체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정말 딴사람이 되어 신나게 써내려갔다. 사랑이 찡찡이 박힌 칭찬 일색이다.

“사랑스러운 ‘콘스탄체’는 집안일을 도맡아하며 다른 자매들 뒷바라지까지 하는 착한 성품은 물론, 총명하기까지 한 처녀지요. 또한 그녀는 못생기지는 않았지만 예쁘다고도 할 수 없는 외모를 지녔어요. 그러나 그녀의 작고 검은 두 눈과 우아한 몸가짐은 정말 아름답지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다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현모양처감이고요. 더더욱 다행인 것은 낭비벽이 없다는 점이지요. 그녀가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아주 소박하고 깔끔한 편이지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예요.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아버지와 베버 부인의 완강한 반대에도 아랑곳않고 두 사람은 서둘러서 결혼을 했다. 

 
아버지의 사랑과 슬픈 소식

모차르트에게 아버지의 헌신은 참으로 컸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궁정음악가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 천재성을 살려주기 위해 여섯 살, 어린시절부터 마차를 타고 들판을 달려 연주여행을 다녔다.
어린 모차르트는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된 자연의 빛과 소리 , 특히 다양한 문화속의 음악을 두루 접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이 행보는 20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당대의 음악가들 대부분이 평생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에 비하면 엄청난 경험이자 자산이 되었다. 이에 클래식 평론가들도 그의 시공을 초월한 독특한 느낌의 연주가 이 보헤미안적인 생활에서 나온다고 인정한 바 있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 국경을 넘나들며 음악도시라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다녔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2,3년에 걸친 음악 여행이 그의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잘츠부르크에서 슬픈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버지의 부음이었다. 그 때 모차르트가 누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사랑하는 누나! 누나가 생활에 곤란을 겪는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그동안 늘 생각해 온대로 정말 기쁜 마음으로 누나에게 아버지가 남기신 모든 걸 주고 싶어. 하지만 지금 나는 아내와 아이를 부양해야하는 입장이고 누나한테 별 필요없겠지만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잘 생각해 주길 바래.”

1788년 무렵 모차르트는 경제적 궁핍이 극에 달한다. 가장으로써 그의 인생은 눈보라 휘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그러니 빈의 구시가지는 비싸서 있을 처지가 못되니 교통이 좀 불편한 변두리로 이사를 했다. 이토록 비참하게 경제적으로 궁핍했음에도 모차르트는 교향곡 39번, 40번, 41번을 또다시 세상에 내놓았고 모두 명곡으로 지금껏 온 인류의 사랑을 받고 있다. 참으로 존경스럽다.

그렇지만 아내인 콘스탄체의 입장에서 보면 존경심보다 연신 짓누르는 현실이 더 무거웠으리라. 어쩌면 현실에서 도망쳐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순순히 참고 삭인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사랑이다. 여기서 필자는 그녀의 조신하고 갸륵한 마음씨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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