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艸衣)
초의(艸衣)
  • 황인술
  • 승인 2008.09.1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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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생 논술교실 ⑤⑨
한승원

(韓勝源, 1939.10.8~)

▲ 한승원     © 독서신문
소설가. 『해산 가는 길』과 『사랑』 등 수백 편에 이르는 작품을 통해 남해 바닷가를 고향의 언어인 토착어를 구사하며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다뤘다. 그의 고향에서는 포구 갯바위에 문학비를 세웠다.

 
『艸衣』 - 차, 사상, 예술을 선으로 승화시킨 풀옷의 선승이라는 뜻으로 작가 한승원이 복원하고 형상화해낸 전작 장편 역사인물 소설로 조선 후기 최고의 지식인·예술가들과 벗하며 시와 그림과 선, 삶과 우주를 논했던 최고의 선승 艸衣의 일대기이다.

어린 시절 초의 스님은 집 근처에 있던 연못에 빠진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 연못은 연꽃이 피어 있는 곳으로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는 정통왕생의 소망을 의미’하는 곳이기 때문에 우주적인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연못에 빠진 초의는 근처를 지나던 한 스님에 의해 구출되었는데 그 스님은 초의의 조부와 모친에게 그를 출가시킬 것을 권유하지만, 세월이 조금 더 흐른 후에야 초의는 출가의 길을 걷게 된다. 연못은 하늘을 머금고 있는 숭엄하고 신비스러운 세계를 상징함은 물론 연꽃을 피우는 하나의 우주적인 자궁이었다.

 
연못 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재미있을 듯싶었다. 연못에는 하늘과 구름이 들어와 있고, 늙은 적송과 산과 대숲이 들어와 있었다. 그의 또 하나의 얼굴도 들어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세상 속에 댓잎배를 띄우고 있었다. 그 배를 타고 그 속 어디론가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한 척을 띄우고 또 한 척을 띄웠다. 그 중 한 척이 바람에 넘어졌다. 그것을 일으켜 세우려고 한 손을 내밀었는데 발이 미끄러졌고, 몸이 거꾸로 처박혔다. … 물을 삼키고 또 삼켰다. 눈앞에 검푸른 어둠이 진을 쳤다....

“저 연못은 관세음보살님의 자궁입니다. 보살님이 낳아 키우던 아이는 이미 저 연못에 빠져 죽었고, 이제 이 아이는 부처님께서 점지해 주셨습니다. 보살님의 아이는 원래 단명한 아이였는데, 부처님께서 새로이 명을 한없이 길게 이어주셨으니 아마 세수 팔십은 훌쩍 넘도록 장수할 것이외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초의가 관음보살의 자궁인 연못에 빠져 불교의 세례를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선승(禪僧)이 된 초의는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범패를 부르고 탱화를 그리면서도 찻잎을 따 가마솥에 볶아서 차를 만드는 일과, 가마를 메고 산을 넘으면서 가마 속의 지체 높은 사람을 위해 일을 하며 고통 받는 자의 아픔을 알고 인내하며 다도(茶道)를 익혀 불교를 유학자들에게 전파하는 종교적인 노력을 한다.

초의는 “차(茶)의 신명이 곧 삶의 신명”이라 생각하고 차를 만들어 차의 향기를 마시면서 차 맛을 느끼며 삶을 초극한다. 또한 산사(山寺)에서 바라춤을 배우고 범패를 하는 것 또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차원에서 구도(求道)하는 것 못지않게 민중들로 하여금 마음을 비우고 해탈해서 초극적인 불교적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조선은 표면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폈지만, 실제로는 유학자가 문집을 낼 때는 스님에게서 발문을 얻어 싣고, 스님들이 시집을 낼 때는 유학자들의 발문을 싣는 등 불교와 유학은 친밀했다. 즉, ‘반듯하게 지은 집처럼 규모를 앞세운’ 유학과 ‘벗어남으로 인해 자유자재한’ 불교는 은연중에 서로 보완 관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초의가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 일환으로 높은 수준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속세에 전파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는 정다산과 추사 김정희와 교우하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하면서 외로움을 위로하며 치유해 준다.

 
연꽃화생 - 연꽃은 7∼8월에 못에서 피는데 뿌리와 줄기를 물 속에 내리고 잎은 물위에 둥실 뜬다. 연봉은 늠름한 줄기를 따라 수면 위에 높이 솟아오른다. 연화(蓮華)는 맑고 잔잔한 파도에 씻겨 물방울이 맺혀도 요염하지 않다. 혹자는 ‘국화는 은일이며, 모란은 부기요, 연꽃은 군자’라 하였다. 연꽃은 예로부터 꽃 중의 군자로 칭송을 받아왔으며 순결과 초세의 상징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불교에서는 청정의 상징으로, 유교에서는 군자의 청빈과 고고함에 비유하고, 도교에서는 팔신선(八神仙)중의 하나인 하선고(何仙姑)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신성한 꽃이기도 하다. 보통식물은 꽃이 먼저 되고 그 후에야 열매를 맺는데 유독 연꽃만이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장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사와 관련하여 빠른 시기에 아들을 연이어 얻는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연꽃 즉 연(連)과 발음이 같고 연밥의 수많은 씨앗이 많은 아들을 보는 것 같기 때문에 연꽃과 연밥을 연생귀자(連生貴子)라는 뜻으로 불렀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은 후에는 조상들이 사는 세계로 되돌아간다고 믿었다. 불교가 공인된 소수림왕(372년)이후 사람들은 이전과는 달리 수미산 위의 하늘 세계나 유토피아인 정토(淨土)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5세기 고구려 고분에서 발견되는 연꽃을 주제로 한 벽화는 이와같이 전생(轉生) 및 정토왕생적(淨土往生的) 내세관을 내용을 담아 표현했다.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은 석가모니가 탄생법에 대해 말한 사생(四生)이다. 이 가운데 화생은 내생에서의 초현실적 탄생을 말한다. 불가에서는 연꽃과 화생을 결합시켜 연꽃화생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성립시켰다. 불교신자에게 내세 정토에서의 연꽃화생이란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는 정통왕생의 소망을 의미한다.

- 박향순<화가>
  출처 : http://kdaq.empas.com/dbdic/db_view.jsp?ps=src&num=4042984

 

심리학적 관점에서 본 美的 삶이란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美”라는 요소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미”의 사전적 해석은 ‘눈 따위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인간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미적 태도를 지니면, 이에 상응하는 다른 단어들을 상당히 많이 사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비체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다음과 같은 다양한 표현이 있을 수 있다. “강렬한”, “성공적인”, “아름다운”, “흥미로운”, “기발한”, “인상적인”, “심오한”, “웅장한”, “압도하는”, “매혹적인”, “진부한”, “실패한”, “재미없는”, “추한”, “지루한”, “평균적인”, “단조로운”, “뻔한”, “저급한”, “밋밋한” 등(디터 타이헤르트, 「쉽게 읽는 칸트 판단력 비판」, 이학사, 2003, 30쪽.) 미의 분석은 우리가 미적 태도로 사용하는 온갖 수준의 술어적 진술을 다루지는 않으며, 단지 하나의 술어, 즉 “아름답다”라는 술어만을 다룬다.

어떤 대상에 이러한 술어를 부여하는 판단을 칸트는 취미판단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미(혹은 추)의 관점에서 판단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초의』를 비체계적이고 불완전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강렬한”, “성공적인”, “아름다운”, “흥미로운”, “기발한”, “인상적인”, “심오한”, “웅장한”, “압도하는”, “매혹적인”이다(위의 책 33쪽).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취미판단의 규정 근거는 주관적으로, 관찰대상에 대한 판단 주체, 즉 독자의 관점이 쾌 혹은 불쾌한 상태로 선택되어 작동하기 때문이다. 주관적이라는 것은 한 개체가 만족과 불만족을 느끼는 것이며 이는 ‘쾌’ 또는 ‘불쾌’의 감정”(위의 책 34쪽)이다.

유쾌한 만족은 ‘쾌’이다. 만족은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서 쾌적함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사물과 현상이 쾌적함을 줄 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쾌나 불쾌를 선택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며 이 과정에서 사물에 대해 다양하고 복잡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되어 있다. 쾌, 불쾌 두 가지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아름다움(美)이란 용어는 종교라는 개념만큼이나 애매하다. 종교란 의미는 유대관계, 관심과 관련, 인연연관, 기도와 숭배 등의 다의적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움과 종교가 만나는 소설이 『초의』로 ‘쾌’의 美라 할 수 있다.

美의 가치는 인간의 눈이나 귀, 미각과 후각, 촉각의 가치인 감각적인 가치와 인지의 근원인 마음으로 느끼는 정신적 가치로 나눠 볼 수 있는데 두 소설은 수도자의 삶을 다뤘기 때문에 후자의 정신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美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적 가치의 美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머리에? 마음에?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은 心이다. 心은 의식이다. 자아를 협박하여 id의 충동을 막아 내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범패를 부르고 탱화를 그리며 찻잎을 따 가마솥에 볶아서 차를 만드는 일과, 가마를 메고 산을 넘으면서 가마 속의 지체 높은 사람을 위해 일을 하며 고통 받는 자의 아픔을 알고 인내하며 다도(茶
▲ 황인술 교수     ©독서신문
道)를 익혀 불교를 유학자들에게 전파하는 종교적인 노력을 보인 초자아 모습을 가지고 있는 초의 스님. 배냇향나는 “차(茶)의 신명이 곧 삶의 신명”이라며 사는 초자아적 삶인 초의 스님의 삶이 있다.

 

논제

쾌, 불쾌 두 가지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美)이란 용어는 종교라는 개념만큼이나 애매하다. 아름다움과 종교가 만나는 소설 『초의』에 나타난 ‘쾌’의 美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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