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코의 상징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의 상징 그레이스 켈리
  • 신금자
  • 승인 2008.08.2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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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의 여인들 20회
▲ 신금자[수필가·본지 편집위원]     ©독서신문
성장(盛裝)을 하다.


그레이스 켈리는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장했다.

그녀는 1929년 11월 12일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나 헨리 에바뉴에서 비교적 부유하게 자랐다. 1934년 필라델피아 세인트 부리짓 학교에 입학하고 1943년에 저먼타운에 있는 스티븐 스쿨로 옮겨 1947년에 고등교육을 마쳤다. 곧 그녀는 배우와 모델 활동을 하기 위해 뉴욕의 아메리칸 드라마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리고 스트린드버그에 있는 브로드웨이프로덕션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첫 작품이 1951년에 발표된 ‘14시간(fourteen hours)’이다. 1952년에 서부활극 ‘하이 눈(high noon)’, 그 이듬해 클라크 케이블의 상대역으로 ‘모감보(mogambo)’에 출연했다. 그리고 ‘시골소녀( the country girl)’에서는 빙 크로즈비의 촌스런 아내 역으로 열연하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다.

그리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을 만나면서 스릴러 영화인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ur murder)’로 우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았다. 이 스릴러 영화를 시작으로 ‘이창(rear window)’, ‘도둑잡기(to catch a thief)’, ‘백조’, ‘상류사회’ 등 히치콕 감독의 수많은 여주인공을 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사실 켈리의 장점은 미모에서 풍기는 정적인 우아함에 있었다. 이 단아한 맵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의 자산이다. 이는 영화 속 역할로까지 이어져 단연 돋보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결국 스크린의 여왕에서 실제 모나코의 왕비로 선택되었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되었던 영화 ‘백조’와 모나코 왕 레니에 3세가 선물한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출연했던 ‘상류사회’의 귀족 파티가 꿈이 아니더란 말이다.

 

세기의 결혼

1956년 4월 모나코에서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며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레이스 켈리가 결혼식을 위해 미국에서 전용함을 타고 모나코 항구에 들어갈 때 바다에서는 모든 배들이 정지하고 일제히 축포와 뱃고동을 울려 장관이었다. 그리고 켈리의 부모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결혼식을 보기 위해 축하객들과 취재진들이 모여들어 호텔 뿐 아니라 거리에도 사람들이 넘쳐났다. 영국 황실을 비롯한 온 유럽이 비행기, 기차, 승용차, 여객선을 타고 모나코로 향했다. 그들은 일 주일 동안 밤마다 도시의 거리를 돌며 전야제를 비롯한 축제를 즐겼다.

마침내 성당에서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고혹적인 웨딩드레스의 꽃문양 레이스에 싸인 그레이스 켈리의 손을 꼭 잡고 입장한 레니에 3세의 가슴에 유럽 영웅시대의 훈장이 유난히 돋보였다. 이렇듯 성대히 부부의 연을 맹세했다. 영화 ‘백조’ 에서의 연출인 듯 아름다웠다. 곧 이들 선남선녀는 대기하고 있던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여 바닷가의 호화 요트에 올랐다. 지중해풍에 두둥실 안겨 신혼여행지인 스페인에서 닻을 내리리라.
 


모나코의 선택

그러나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이 결혼식에는 미리 준비된 시나리오가 있었다니 너무 허탈해하지 말지어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사랑이 필연적이었다는 낌새를 들어보자. 그 속사정은 좀 딱하다.

일단 모나코는 작은 공국이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래야 주변의 몇몇 도시 정도다. 그러니까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인 바티칸시티 다음으로 작은 나라다. 애초에 나라가 형성되었다는 역사보다 그리말디 가문의 가족사를 얘기하는 것이 낫다. 그러다보니 모나코는 언제든지 아무나 가서 쉴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 되었다. 아무 제제를 받지 않고 소득세를 낼 필요조차 없다. 그것이 유럽 사람들이 모나코를 찾게 하는 매력으로 존재했다.

땅덩어리래야 2평방km 정도이니 나라라기보다 동네 한 바퀴 돌아보듯 아침산책을 하기에 알맞은 작은 도시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결혼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버려진 채, 아니면 프랑스에 귀속되었으리라. 프랑스에 둘러싸여 프랑스인이 48%나 살고 있으며 전체인구 25,000명 중의 순수 모나코인은 16% 안팎이라니 나라 돌아가는 폼이 뻔하지 않은가. 국가의 방위, 외교, 경제를 프랑스에 의존하고 있으며 심지어 왕위도 프랑스의 재가를 받는 실정이니 속국보다 더한 보호국인 셈이다.

이 작은 나라에 왕이 실권조차 없으니 슬픈 일이다. 그럼 모나코의 실제적 통치는 누가 했을까? 다행히 그리스의 선박왕인 오나시스가 버티고 있었다. 어찌됐건 레니에 3세는 왕으로 적당히 군림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힘든 것은 다 프랑스에서 해결해주니 두 눈 질끈 감고 한 세상 왕이랍시고 위세를 떨며 살면 그만 아닌가.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레니에 3세가 즉위하자 프랑스가 모나코를 합병할 움직임을 보였다. 독신인데다 후사도 없으니 이 참에 간단히 합병을 해버리자고 생각을 한 것이다.

글쎄, 이 작은 나라의 지탱에 대한 다양한 생각으로 숨이 차다. 대부분의 거주민들은 아무런 소득세도 없이 태양과 함께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기 위해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연중 300일을 태양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종일 바닷가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누워 있는 사람도 많다. 오래전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은 마땅히 돈 쓸 곳이 없었다. 그러니 자유로이 모나코 해변으로 죄 몰려 요트를 정박하고 선텐을 하거나 카지노에 박혀서 돈들을 뿌리고 갔다. 그런데 그 당시는 모나코도 파리만 날리고 있어 경제사정이 심각했다. 2차대전이 끝난 시점이라 참전했던 나라들의 어려운 경제파고에 사정없이 휩쓸렸다.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요는 미국이다. 그 경제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던 미국을 끌어들일 묘안이 없을까. 역시 오나시스는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짠다. 곧 레니에 3세를 불렀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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