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문으로 더 유명한 예카테리나 여제 ②
염문으로 더 유명한 예카테리나 여제 ②
  • 신금자
  • 승인 2008.06.27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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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의 여인들 17회
▲ 신금자[수필가·본지 편집위원]     ©독서신문
영원히 머무를 답안은 없는가?

그녀의 민족문화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다. 따라서 서구 계몽사상을 표방하려고 온 정성을 쏟았다. 이 모든 분야에 전문가적인 안목이 필요했다. 그럴 요량으로 일단 자신이 먼저 읽고 챙겼다. 그녀의 일대기 영화에서 오래도록 긴 여운을 준 짧은 대사가 생각난다.

“공은 루소를 읽어 보았소?”

자신의 측근에게 루소의 사상을 읽어보았는지 물었다. 당시 그녀의 관심사를 대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는 루소의 자유주의 계몽사상에 푹 빠져 지내는 듯했다. 결국 나라 안팎으로 굳게 닫힌 빗장을 풀고 사회를 개혁할 참이었다. 민중의 생각을 알아야 사회개혁을 할 수도, 막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전 유럽을 휘젓고 다닌 프랑스 나폴레옹도 볼테르와 루소를 읽고 비로소 정치적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사실 러시아의 정치나 군대는 어느 나라와 대적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초고속으로 컸다. 딱한 것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 아주 보수적이었던 탓에 자유주의와 산업혁명이 서유럽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었다. 그 때문에 서유럽 사람들에게 늘 업신여김을 당하며 살았다.

예카테리나 여제도 그들의 자유사상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특히 프랑스의 문화에 마음을 빼앗기다시피 했다. 그래서 프랑스를 모방한 계몽주의의 사회개혁을 지휘했다.

 

봉건사회가 탄생되다

불행히도 그녀가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녀는 당시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푸가초프의 반란,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현실주의자로 되돌아갔다. 농노제를 장려한 탓에 지주들의 배만 불리고 농노들의 어려움이 날로 커 갔다.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푸가초프’의 난이다. 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절대군주를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도 그녀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 후, 그녀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권과 농노제를 더욱 채근한다. 열정을 쏟던 자유주의 이념을 모두 거둬들이고 이에 반발하는 자들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예카테리나 자신은 늘 ‘공화주의’라고 부르짖었으나 러시아의 지배계층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틀어쥐고 말았다. 당연히 그들의 그늘에서 시름할 하층민들이 늘어났다. 한순간에 개혁사회를 팽개치고 계몽주의의 ‘봉건사회’로 회귀하고 말았다. 11세기~13세기 신성로마제국, 프랑스와 영국에서 실시한 노예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중간 단계쯤 된다. 그녀가 개인 중심적 현대 사조를 버리고 옛날의 폐쇄적 사상을 다시 고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 불행한 사회 현실이 러시아의 문학과 음악 기타 여러 분야의 예술인들에게 큰 자극제가 된 셈이다. 러시아 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방대한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 그것이다.

다행히 많은 외국 예술가와 문화인들을 변함없이 그녀가 러시아로 초청했다. 프랑스의 시인 볼테르, 디드로와 서신으로 도움을 주고받았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마린스키 극장과 에르미타주 궁을 넓혀 미술관, 학술 도서관 및 박물관을 건립하며 문화국민의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의 문화 애호정책에 힘입어 후일 푸슈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등 세계적인 문인과 음악인을 배출하였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그들의 열광적인 후원자였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로소이다!

예카테리나 여제를 거친 애인이 20명쯤 되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일부는 신임이 두터운 조언자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녀가 지나친 성적 유희를 즐겼다는 얘기들은 별로 근거가 없어 보인다. 다만 그녀가 10대에 러시아 궁에 들어와서 남편이 황제에 오르기까지 18년 동안 그들은 명목상 부부였을 뿐, 서로 어긋난 길을 걸었던 탓이 더 컸다. 초기에 남성 능력이 없었던 표트르 3세는 나이가 들면서 광적으로 변했고 관심 밖으로 멀어진 그녀도 외로움에 애써 무너지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국정에 관한 사무와 개인적 쾌락을 혼동하지는 않았다.

다만 말년에 아들 파벨과 불화가 잦았다. 다소 모자라는 아들을 두고 손자 알렉산드르를 편애하여 제위를 손자에게 물려주려 한 것이 원인이었다. 다행히 손자가 아버지를 위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염려대로 아들 파벨이 지배한 5년간은 누가 보더라도 철저한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황제 교육을 시킨 세손이 바로 무적의 나폴레옹을 무너뜨린 그 유명한 알렉산드르 1세이다.

어쩌랴. “더 많이 알면 더 많이 용서하게 된다.”던 예카테리나 대제의 명언이다. 말년에 여제 스스로 자꾸만 주변사람들에게서 고립을 자초했다. 하긴 그녀가 그토록 감탄해하던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도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모든 곳에서 사슬에 묶여 있다."라고 적어놓았다.

그런데 루소는 이 유명한 문장을 파기하여 인간이 사슬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더불어 사회속의 인간은 결코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가난한 자 못지않게 부자도 행복하지는 않다고 역설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넵스키 대로는 그야말로 시원하게 뻗어 있다. 건듯, 검푸른 네바 강을 건너오는 바람과 닿아 있다. 근대에 이르러 이 곳은 파리와 더불어 유럽의 중심지가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거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안나가 마지막에 투신자살하는 바로 그 기차 정거장이 있는 곳이다.

예술인들의 애환이 서린,  정치적 음모와 피로 물든 로맨스의 도시이다. 이 도시의 겨울궁전 에르미타주는 기억하리라. 그녀의 속정을 알리라. 역사의 도시에 미로 같은 슬픔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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