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문으로 더 유명한 예카테리나 여제
염문으로 더 유명한 예카테리나 여제
  • 신금자
  • 승인 2008.06.13 1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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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캐서린 대제)
 
여걸시대로 가다


▲ 신금자[수필가·본지 편집위원]     ©독서신문
필자는, 어떤 경우든 자기 역할은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미덥다. 그러나 세계사의 큰 줄기가 되는 역사도 사가들 아니, 민중들에게 한숨과 탄식을 안겼던 게 사실이다. 특히 황실의 왕좌는 늘 음모와 피로 득시글거렸다. 그 중심에는 물려받은 왕권을 지키지도 못할 젖먹이, 그래서 세도가들에 의해 권좌가 좌충우돌하는가 하면, 꼭두각시로 내세운, 아니 조금 우둔한 승계자라도 나타나면 그 틈을 냉큼 비집고 들어가 할퀴고 부스럼내서 엉뚱한 사람이 왕좌를 꿰차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더러 역사는 거꾸로 돌기도 한다. 황족과 그 주변인물들이 공적인 책임없이 정견을 갖는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어서 한 치 앞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표트르 1세가 죽은 후 16년 여 왕권이 실종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유약한 첫째 왕비의 아들 대신 둘째부인의 아들을 승계자로 지명하고 죽자 공주인 엘리자베타가 전면에 나서 왕궁을 점령하고 어린 아우들 섭정을 하다 마침내 여황제의 왕관까지 쓰게 되었다. 자그마치 20여 년간 통치를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혈통을 이어갈 후사가 없었다. 다행히 프로이센으로 출가하여 아들을 하나 남기고 죽은 언니가 있었다. 엘리자베타는 그 조카(카를 울리히)를 데려다 제위 계승자로 삼았다. 훗날 표트르 3세가 된다.

 
쿠데타로 등극한 예카테리나 여제

표트르 3세를 예카테리나가 공연히 황제의 자리에서 쫓아냈을까? 분명한 것은 남편이 온전한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그녀가 여제가 되려고 광폭해지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감히 황족을 꿈꿀 수 있는 높은 신분의 귀족도 못되었다. 다만 그녀의 어머니가 공작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엘리자베타 여제, 그러니까 여제의 약혼자였다가 죽은 오빠와 맺어진 인연으로 약간 알고 지내다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넌지시 혼담을 넣었으리라. 엘리자베타 여제도 미남이었던 약혼자를 못잊고 있던 차에 흔쾌히 예카테리나를 대공비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저, 가능하다면 왕비가 되고 싶었던 그녀, 그 소망이 이제 손에 잡힐 듯하다. 한데 어찌된 일인가? 남편인 카를 대공은 완고한 아이처럼 지능이 낮고 신경질적이었다. 더 나아가 심약한데다 술 중독자라는 입소문이 파다했다.

한편, 엘리자베타 여왕과 프로이센은 적대관계였다. 그래서 7년 동안 전쟁 중이었다. 그런데 황태자로 세운 카를 울리히는 프로이센에서 양자로 들여온 탓에 고향 프로이센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떠받드는 숭배자였다. 이를 엘리자베타가 몰랐을까? 표트르를 황태자로 세운 것은 모험인가? 위험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예카테리나 역시 프로이센 출신이다. 그러나 그녀는 상황판단이 빨랐다. 러시아의 대공비로 간택된 1744년 바로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개명(예카테리나)했다. 러시아어를 배우고 종교도 러시아 정교로 바꾸어 러시아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민중의 인심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정치력에도 눈을 떴다. 파벌을 다져나가는 것만이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현명한 처신에 여제는 판단이 섰으리라. 어쩌면 많은 난관에 직면한 엘리자베타 여제가 고심하다 내놓은 전략일 수도 있다. 후에 여제가 황태자비 예카테리나의 방종한 행동을 봐준 이유가 예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황태자가 무기력하다하여 정부를 두어 아들까지 낳았다. 그래도 여제는 앞으로 황후가 될 사람으로 슬며시 눈감아줬다. 오히려 아이를 못 낳을지도 모르는 황태자 때문에 부추겼다는 설도 있다. 혹여 여제가 무능한 조카보다 예카테리나에게 기대를 더 했던 건 아니었을까.

1762년, 엘리자베타가 죽자 표트르는 ‘표트르 3세’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표트르 3세는 당장 러시아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중단하라 명하고 프로이센을 동맹국으로 선포하였다. 염려했던 바, 러시아의 귀족과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예카테리나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다. 모든 군대가 속속 그녀의 편에 섰다. 예카테리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규합된 군대를 이끌고 수도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입성한다. 그 즉시 카잔 대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되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예카테리나가 대관식을 치루고 있을 때 표트르 3세는 감옥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통치 능력보다는 염문으로 더 유명하다?

예카테리나는 어쩌면 음탕하고 문란한 여제란 혹평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사생활은 분명 많이 어긋나 있었다. 여북하면 그녀의 손자인 니콜라이 1세마저 “왕관을 쓴 창녀” 라고 불렀으랴. 하나 사생활은 어디까지나 사생활인가. 당장 여제에서 끌어내려도 시원찮을 판에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칭송했다. 그들이 독일 프로이센 출신에다 황위를 뺏고 여러 정부를 두어 염문을 뿌려대던 예카테리나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던 때문이다.

그 무렵 서구 열강들은 은근히 러시아인들을 괴롭혔다. 한 마디로 깔보고 내려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랬던 나라가 여제의 통치하에 오히려 강국들을 위협할 정도의 급신장을 했다. 서, 남, 북으로의 영토확장, 프랑스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베낀 문예부흥, 도시건설, 지원 등을 열정적으로 해냈다. 따라서 서구 열강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한꺼번에 샀다. 그녀가 가혹하리만치 파렴치한 지배자란 꼬리표도 이 과정에서 얻었다. 당연히 유럽은 그녀를 무시하며 상종하지 않겠노라는 등, 러시아의 화신으로 불렀다. 그러나 훼방꾼들의 뒷담화정도로 그녀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에 버금가는 역사를 세계사에 남겼음이라! 동토의 러시아에 봄을 부른 문예부흥을 일으켰음이라!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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