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의 인스턴트식 사랑을 거부하는 순애보적 사랑”
“현대인들의 인스턴트식 사랑을 거부하는 순애보적 사랑”
  • 안재동
  • 승인 2008.05.30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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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호의 감성시집 『이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

▲ 이철호 시인     © 독서신문
소설가이자 수필가 그리고 시인이기도 한, 일인 다역의 작가 이철호 씨가 좀 특이한 시집을 냈다. ‘특이’하다는 의미는 올해 초까지도 한국수필가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수필 창작과 발전에 왕성한 의욕을 보여준 그의 이력에 비추어서다. 또한 그는 장편소설 『겨울산』 을 비롯한 여러 권의 장·단편 소설집과 수필집까지 내었기에….

『이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유어북 刊)가 바로 그 책.

우선 시집의 표제시부터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장미꽃만큼이나 / 화사한 미소를 짓는 / 5월의 신부에게 / 우리의 짧았던 만남은 / 바다만큼이나 / 광폭한 만남이었다는 것을 / 보여 줄 수는 없었다. // 드레스를 입은 너의 모습은 / 새벽빛처럼 환했지만 / 가늘게 내쉬는 숨소리는 / 소유하지 못한 / 우리의 운명만큼이나 덧없었다. // 부케를 던지는 신부에게 / 우리는 사랑은 기다림이 되어 / 남아 있다고 / 강물처럼 아직도 흐르고 있다고 / 보여 줄 수는 없었다. // 5월의 신부와 / 내 사랑은 떠났다.

―<이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전문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유보다는 사랑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더 많은 설명을 하듯 나 역시 그랬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사람도 나였고 세상에서 가장 미워한 사람도 나였습니다.” 이철호 시인은 책머리에서 이렇게 밝히면서, “내 안의 삶이 극명하게 치닫는 것을 글로써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만큼 사랑을 해도 우리의 시간은 넘쳐나지 않을 것 같기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노라”고 적고 있다.

▲ 『이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표지     ©독서신문
 

이별이라는 어둠의 무게를 짊어진 / 너는 표현할 줄 모르는 굶주린 바다였다. // 그리움이 메아리 되어 울려도 표현할 줄 모르는 / 너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 욕망의 그늘을 표현할 줄 모르는 / 너는 화석이 되어 갔다.

―<표현할 줄 모르는 너 2> 전문

 

이 시집은 국문과 영문, 2개의 언어로 엮어진 한영(韓英) 대역본이며, 컬러 삽화와 배경그림이 매 장마다 첨가 되어 시각적으로 단조롭지가 않게 만들어졌다. 시는 시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감성적인 분위기를 물씬 자아내면서 요즘 흔한 사랑시류의 시집처럼 보이기도 하다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싶기도 하고…. 무게도 좀 걸쭉히 있어 보이는 이 시집은 좌우간 좀 색달라 보인다.

“언젠가 저자의 손을 보고 의외의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훤칠한 키의 카리스마 깃든 남성적인 외모와는 달리, 섬섬옥수라 할 만큼 여리고도 감성적인 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들이 그의 손과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삽화를 그린 정대진 화백이 전하는 소감이다. 그는 이어 “그러한 손에 의해 잉태된 이 시들은 일생에 단 한번만으로도 좋을 순애보적 사랑을 갈구하며, 현대인들의 인스턴트식 사랑을 거부한다.”고 해설한다.

많은 소설집과 수필집을 내고 한국수필가협회 회장까지 역임하였기에 시인이라고 말하기엔 어쩐지 좀 번지 수가 틀린 듯한 인상도 받게 되는 李작가가 또 이런 감성시집까지 내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좀 파격적인 그의 이미지다.

 

너의 침묵은 / 블랙커피처럼 / 짙었다. // 너의 침묵에 / 나는 허공을 향해 / 질주했다. // 너의 침묵에 / 나는 사막을 / 건넜다. // 너의 침묵에 / 나는 말을 잊었다. // 너의 침묵을 /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 나는 그리워한다.

―<침묵의 도시> 전문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원색적이며 사실적이되 거리낌 없는 애정 표현의 시어들로 창작 되어, 원로문인의 반열에 있는 그의 감수성이 이렇게나 풍부할 수 있을까, 흠칫 놀랄 정도이다. 몇 편의 시에서는 아직 청소년과도 같이 해맑은, 소년기적 감성이 나타난다. 그런 그의 심성이 부러울 정도이다. 그런가 하면, 일부 시편에서는 사랑으로 인한 아픔이랄까 고뇌, 또는 회한 같은 것도 짙게 서려 있다. 그런 면에서는 다분히 사유적이다. 어쩌면 이 시집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일러주고 싶었던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이란 이런 것이야!” 일지도 모른다. 그만의 순애보적 사랑이라 말해도 좋을….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사춘기적 감성의 청소년층에서부터 중·장년층,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전 세대에 걸쳐 흡인 될 수 있는 시편들을 담고 있는 점이 아닐까 한다.

 

너의 손끝에 매달려 있는 눈물은 / 그림자로 남은 나였다. //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어야 된다는 사실에 / 빛을 잃은 눈물은 그림자로 남은 나였다. // 이제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가려진 눈물은 / 그림자로 남은 나였다.

―<눈물로 남은 나> 전문

 

280여 쪽의 이 시집에는 <우리의 사랑은>, <보내지 못하는 이유>, <이별 후의 나>, <대답 없는 이야기>, <떠나는 사람> 등 97편의 시가 제1부 ‘아내의 눈물’, 제2부 ‘혼자 있을 때를 위하여’, 제3부 ‘이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제4부 ‘갈매기 조나단’, 제5부 ‘약천사의 노을’ 등으로 나뉘어 담겼으며, 英譯은 나이채(번역가·미연방 한의사) 씨가 맡았다.

시인은 책머리에서 다시 말한다. “글을 쓰면서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밝음보다는 어두운 기억들로 많이 아파 왔지만 시는 나에게 현실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마다 꿈을 주었고, 이제 이 꿈들은 내 운명의 어둠 속을 벗어나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노라고.

이철호 시인은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마치고 경희대학교 한의학과와 동 대학원을 거쳐 한의학 박사와 한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바 있는 의료인이기도 하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국제펜클럽한국본부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새한국문학회와 소월기념사업회 등의 이사장을 맡는 등 문학단체 활동이 활발하다. 현재 종합문예지 《한국문인》 이사장이기도 하다. 『야누스의 노고』 등 다수의 장편소설과 『거울 속의 가을 남자』 등 다수의 수필집을 포함하여 6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안재동 시인/평론가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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