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에 일군 땀과 정성
문학관에 일군 땀과 정성
  • 이재인
  • 승인 2006.07.0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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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⑪

▲ 이재인 (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흙에다 쓴 글
 산골에 ‘문학관’이란 이름을 붙인 집을 짓고부터 꽤 많은 나무와 풀을 옮겨다 심었다. 그런데 사과나무와 배나무는 각각 네 그루씩 심었다. 해충이 심해 봄과 여름 내내 농약통을 걸머져야 했다.

 산수유와 모과는 합쳐서 여섯 그루를 심었다. 산수유는 봄이면 맨 먼저 피는 꽃이라 하여 영춘화라고도 하는데 나무의 표피가 매화처럼 허물을 벗는 게 특징이다. 모과나무 역시 표피가 벗겨지면 마치 연륜이 있는 고목인양 보이기에 관상용으로도 그만이다. 그러나 해충인 뜨물이 몰려들기 때문에 다른 식물들에게 해가 될까봐 두 그루만 심었다.

 거기에다 청단풍 홍단풍을 열다섯 그루나 심었다. 5월이면 홍단풍의 화사함이, 가을이면 청단풍의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붉은 빛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5월에는 연보라빛의 라일락꽃과 은은한 향기를, 6월에는 황록색의 호박꽃을 보기 위한 배려도 했다. 그 후 일본 목련, 중충 자목련, 은행나무, 감나무 열 그루도 내 손으로 뿌리를 묻었다. 이 밖에 이름을 다 외우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나무들과 들꽃들을 심어 나갔다.

 처음에는 이곳에 집을 짓고 조용히 묻혀 글을 쓰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나무와 꽃과 땅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다. 풀을 뽑고 거름을 뿌려주고 가지를 자르고 나무를 옮기는 일이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오는 고마운 내방객들을 위해 텃밭에다가 상추, 아욱, 쑥갓 등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번거롭지만 농약을 쓰지 않고 퇴비를 만들어 설렁설렁 뿌려주고 때맞춰 물 주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농부는 손톱 밑에 가시 안 박힐 날이 없다고 하듯이, 지금 내 손은 흙일로 험하게 거칠어지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내가 심고 가꾼 이들 꽃나무의 피고 짐을 보면서 몇 번이고 하느님의 섭리에 무릎을 쳤다. 나무는 저마다 성질과 생리가 다르지만 알맞게 거름과 물을 조절하면서 정성을 기울이면 대 번에 아름다운 꽃들을 치워낸다. 내가 보여준 정성을 외면하지 않고 그에 대한 보답을 꼭 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비탈이면 비탈에서, 옥토라면 옥토에서, 박토라면 박토에서, 결코 자만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속내 깊이 간직해온 꽃잎과 꽃빛을 아낌없이 피워 올린다. 결코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시절과 계절에 따라 제 차례가 오면 줄기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순명의 철학을 보여준다.
 

올해도 새봄이 오자 어김없이 산수유가 맨 먼저 샛노란 꽃잎파리들을 줄기마다 터질 듯 매달고 있다. 매화나무에 돋아난 초록빛 매실 몽오리는 탱탱하게 봄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까치란 녀석이 둥지를 짓느라 이리 날고 저리 날면서 경계하는 소리로 깩깩거리지만 듣기 싫지 않다. 보기 힘든 굴뚝새로 포로롱거리면서 찔레 덤불 속을 뻔질나게 출입한다. 둥지를 틀고 알을 낳겠다고 조잘조잘 지저귀는 은유적인 표현을 나는 즐겨 귀담아 듣는다.

 살구나무 앞에 졸고 있던 사나운 개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멍멍 짖다가 제풀에 싱겁게 입을 닫자 어슬렁거리던 수탉이 덩달아 ‘꼬끼오’ 울어본다. 나는 괜히 좋은 소식이 올 것만 같아 가슴이 설렌다.

 대숲과 소나무 사이를 거쳐 오는 맑은 바람, 그 속에 담겨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 속에 담겨 있는 오염된 인간의 언어들이 맑게 씻기는 것 같아. ‘초록과 연두에 가까운, 분홍과 다홍에 흡사한’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자연의 색깔들을 바라보며 나는 왜소한 인간으로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땅을 밝으며 나무를 가꾸면서 하느님의 섭리와 겸손의 미학을 터득하였다고 하면 오만이 아닐까 싶지만, 나는 온갖 나무들이 비바람을 견뎌가며 묵묵히 제 할일을 다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이 저 나무들을 통해 우리 인간들이 지녀야 할 삶의 자세를 일러주시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만약 온갖 종류의 인간들이 저렇듯 모여 있다면 저토록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이다.

 글을 쓰기 위해 산골에 집을 지었지만, 나는 그동안 원고지대신 흙에다 글을 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오만한 언어가 아닌 자연의 겸허한 언어를 배워가며 내가 느끼고 깨달은 바를 흙 위에 옮겨 적었던 것이라고 위안하면서….

▲ 한국문인인장박물관 전경


잡초에게 배우는 자연의 순리
 시골에 마련해 둔 집을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웃자란 잡초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잔디를 듬성듬성 심은 탓에 이른 봄부터 말복까지 억센 잡초들이 바람결에 포자를 안고 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고 나면 또 생기고 자고 나면 또 생겨났다. 마당가, 뒤뜰, 앞뜰을 가리지 않고 자라난 잡풀들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학교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쯤, 주 중 하루는 시골에 가서 잡초를 베거나 뽑는 게 나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잡초는 그대로 방치하면 금세 씨를 맺어 바람을 타고 이곳저곳에 씨앗을 날려 보낸다. 이른바 신의 섭리에 따른 종족 보존이랄까. 원초적인 생명 의식이랄까, 그 끈질긴 번식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손바닥만한 우리 집 잔디밭도 무성한 잡초 군단들에게 점령당하여, 급기야는 대량 살육(?)의 제초제를 꺼내 들고 대항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랐다.

 그렇지만 저수지 상류에 살고 있는 나는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다. 무성한 잡초들을 눈앞에 두고 보노라면 제초제를 이용한 독가스전(?)으로 섬멸해 버리고 싶지만, 그것이 미칠 악영향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런 유혹을 뿌리치곤 한다. 이렇게 2년 가까이 제초제에 의지하지 않고 뜰을 가꾸다보니 내 집 마당으로 반가운 옛 손님들이 하나 둘씩 찾아들었다. 여치, 땅개비, 사마귀, 개구리, 뱀, 두꺼비 등.

 이런 곤충이나 동물들은 내 어린 시절에 늘 가까이 있었던 친숙한 것들이다. 동심 속이 친구들이었으며 살아 있는 장난감이었으며 자연 공부였다. 흔히 볼 수 있었기에 그것들이 징그럽다거나 낯설지 않았다. 그저 우리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었고 산과 들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대부분의 어린이들에게는 이런 곤충이나 동물들이 교과서나 생물 도감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특히 토시에 사는 아이들에겐 여치나 땅개비처럼 작고 귀여운 곤충들까지 징그럽거나 무서운 것이 되고 말았다.
 요즘 학교나 사회에서 자연보호를 목청껏 외쳐대고 있지만 자연의 모든 것들을 친숙하게 느끼고 이웃처럼 받아들여야만, 그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교실 안에서 아무리 교육을 시키고 캠페인을 벌여도 헛바퀴 굴러가듯 소용없는 일이 될 뿐이다.

 아무튼 이러한 현실에서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내 집 뜰을 친구는 ‘작은 천국’이라 일컬었다. 천국이란 말을 잡초와 꽃, 곤충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뜻으로 해석하자니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이번 여름에도 식구들을 총동원하여 잡초 사냥에 긴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손이 미치지 못하여 잡초들을 뿌리 째 없애지 못한 것인데, 그런 나의 뜰을 공동체라 했으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는 잡초를 달리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잡초는 자연의 법칙에 가장 잘 순응하며 살아가는 식물이 아닌가.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그곳에 적응하여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인간에게 불필요하다는 단 한의 이유 때문에 뿌리째 뽑혀 나가는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잡초도 여러 가지 유익한 데가 있다.
 잡초 중에는 신비한 약효를 사진 것도 있고, 경사진 곳에서는 그 억센 뿌리로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던 시절에는 이 잡초를 캐어다 식량 대용으로 먹기도 했다. 심한 가뭄이나 장마가 드는 등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잡초들은 그 억척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오히려 인간의 생명을 구해주기도 했던 것이다.

 인간의 속성 속에는 ‘나’의 입장에서 ‘남’을 평가하는 상대적 가치가 알게 모르게 깔려 있다. 삶의 모든 갈등이 이러한 가치 판단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기심도 바로 이러한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잡초 역시 인간이 경작을 시작하기 이전에는 하나의 풀로 존재했지만, 경작을 하고 난 뒤부터는 잡초로 전락하여 인간의 적이 되고 말았다. 잡초가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도, 어쩌면 인간에게 뿌리째 뽑히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농과대학에서는 “잡초방제학”이라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잡초를 무조건 다 없애는 ‘제초’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살려두고 제거하는 ‘방제’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어떤 작물에 나쁘다고 해서 잡초를 모조리 제거하면 오히려 그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기에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생겨난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야 할 자연의 순리가 현대 과학으로 입증된 셈이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방제’를 하는 바람에 나의 뜰은 그야말로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자연의 순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제초제를 뿌렸다면 찾아오지 않았을 온갖 곤충과 동물이 잡초 사이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잔디와 아름다운 꽃들이 있어도 움직이는 생명체가 살아 있지 않은 곳을 진정한 자연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잡초들이 사는 마당 한켠에 내려섰다. 달빛 아래 저마다의 모양새와 빛깔로 어우러진 모습은 아름다운 꽃밭에 다름 아니었다. 달맞이꽃, 패랭이, 들국화, 쑥부쟁이, 이렇듯 작고 어여쁜 꽃들을 잡초로 전락시킨 인간의 이기심을, 그것을 뿌리 뽑지 못해 안달을 하던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손에 미치지 못해 마당 한구석에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의 군락들, 나는 그곳을 그들의 영토로 다시 반환하기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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