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결혼했다던 베스 여왕①
영국과 결혼했다던 베스 여왕①
  • 신금자
  • 승인 2008.05.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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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 신금자[수필가·본지 편집위원]     ©독서신문
 공주로 태어난 왕자


 필자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에 대해 여성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고민을 해야 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는 영특한 지도자로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왕좌를 지켰다. 하지만 여자로서 누린 삶은 없었던 셈이다.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아니, 이루지 못한 사랑 대신 국민들에게 더 큰 사랑을 받았을지라도 연민은 인지상정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 왕가의 두 번째 왕인 헨리 8세와 엔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세 살 되던 해 어머니를 잃는다. 아버지인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결혼하기위해 들인 공은 눈물겨울 정도다. 앤이 약혼자가 있었음에도 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한껏 저자세를 취하나 앤은 냉담하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앤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결국 앤이 궁에서 왕비의 시중을 들며 힘과 권력의 중심에 있는 왕의 매력에 미혹되고 만다. 대신 결혼을 하면 영국의 왕비로 해줄 것과 장차 아들을 낳으면 왕위 계승을 해달라는 약속을 받아낸다.

 문제는 앤과 결혼하기 위해선 먼저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미 교황청은 스페인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왕비 캐서린도 스페인 출신이다. 당연히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할 리 없다. 그러니 헨리 8세는 교황청을 무시하고 구교도인 가톨릭을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반대파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리 요란하게 올린 결혼도 오래지 않아 금이 갔다. 앤이 낳은 엘리자베스 공주, 즉 왕자가 아니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실 부왕 헨리 8세는 아들 욕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가 초조했던 만큼 6명의 왕비를 맞았지만 병약한 아들 하나 달랑이라니, 예측이라도 한 것일까. 첫째 왕비 캐서린을 내친 것도 따지고 보면 아들을 못 낳은 탓이다. 딸 하나 낳고 습관적으로 유산을 하자 앤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리라. 그러나 숙명인 것을 어찌하랴. 그녀도 아들을 안겨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낳은 엘리자베스 공주를 왕위 계승자로 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하들이 죽임을 당하자 결국 앤을 간통죄로 몰아 딸과 함께 런던탑에 가두었다. 나중에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그녀를 끝내 참수했다. 다행히 앤의 간곡한 부탁으로 딸인 엘리자베스는 살아남았다.

 이는 후일, 화가 난 왕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간통죄로 몰았다는 설도 있고 왕이 그토록 아들에 집착을 하자 앤 불린이 아들을 얻기 위해 자기 오빠와 내통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리고 3번째 후처로 왕비가 된 시모어도 에드워드 6세를 낳고 산욕열로 죽었고 마지막 왕비도 딸을 출산하다 죽었다.

 이제 그의 슬하에 캐서린이 낳은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인 메리와 병약한 아들 에드워드 6세 뿐이었다. 그 이유로 헨리 8세가 여섯 왕비 중 왕자를 낳아준 셋째 부인을 가장 그리워했고 죽어서도 그녀의 옆에 묻혔다고 한다. 그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 다음 왕위를 계승했지만 곧 죽었다. 병 때문에 16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한편 구족 '더들리'는 에드워드 6세가 병약한 것을 미리 알고 일을 꾸민다.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는 그들 두 어머니가 이혼과 참수를 당했다. 그러니 출생과 신분에 문제가 있어 왕위 계승이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동시에 에드워드 6세가 두 이복 누나를 싫어하는 것을 알아채고 헨리 7세의 외증손녀인 '제인 그레이'를 자기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부모인 자신들의 신교도와 권력을 유지할 셈으로 제인에 대해서 에드워드 6세에게 수차례 설득하여 유지를 받아낸다.
 그리고 에드워드 6세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 제인을 여왕의 자리에 앉혔다. 장녀 메리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도 없으려니와 당장 메리 자신이 요주의 인물로 유폐될 위기를 맞았다. 이에 살길을 모색하다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돌진했다. 정작 정치에 뜻도 없고 싫다는 제인을 끌어다 왕권의 중심에 몰아넣은 결과다. 결국 그녀는 엘리자베스의 이복언니 메리에 의해 9일 만에 왕좌를 내놓고 18세 꼬다운 나이에 참수되었다. 불행한 어린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메리 공주를 응원해준 국민들의 힘이 더 컸다.  

 그래서 사실상 메리가 최초의 영국여왕 등극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 예상대로 메리1세는 가톨릭의 부활에 힘썼고 신교도를 박해하고 수백 명을 처단했다.  ‘피의 메리’라 불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무시무시한 처단에도 엘리자베스는 가톨릭을 인정하는 척 하긴 했으나 부왕의 영향을 받은 신교도에 가담했다. 그 탓에 메리 여왕이 엘리자베스를 대놓고 미워했다. 하마터면 엘리자베스의 치세는커녕 그녀의 시대가 오지도 못할 뻔하였다. 하긴 과거 그녀 자신이 겪은 안좋은 기억때문이었을까. 다행히 메리 여왕이 마지막 순간에 동생에게 왕위 계승을 인정하고 눈을 감았다.

 

가부장적 세계의 처녀 통치자

 어머니를 위시해 가까운 사람들의 처형 및 죽음, 그리고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으로 인해 혼란스런 어린시절을 보낸 엘리자베스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그녀지만 잠시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곧 탐험가 '월터'의 고백을 뒤로하고 나라를 택했다. 방년 25세에  여왕에 즉위했다. 무려 45년간 그녀가 영국을 통치했다.
 그러니 결혼하지 않은 여왕으로서 느낀 고뇌 같은 것이 엄청났을 것이다. 당시 이웃한 스페인은 가톨릭과 기독교간의 분쟁을 빌미로 영국을 호시탐탐 노렸다. 숱하게 행해지는 정치적 음모 속에서 고독하면서도 강건하려 노력했던 그녀였다.
 여왕에게 잇따르는 고독한 선택의 삶, 그런 언급이 일체 없는 역사서가 조금 섭섭했다. 그녀도 명실상부한 국왕이었다. 업적은 있고 사랑이 없었다니 유감스럽다. 무릇 국왕의 자리는 늘 왕비 외에 후궁에다 후궁들로 헤아릴 수 없는 서열을 세우지 않았던가. 왕좌를 물릴 자손이 튼실해야한다고 부르짖지 않았던가.
 여왕은 나라와 결혼했다지만 단지 그 이유뿐이었으랴. 혹여 모계로 이어지는 왕실을 환영하지 않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여섯 아내를 두었던 아버지와 다섯 명의 남자와 간통을 했다고 알려진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린 나이에 겪은 혼란스런 사건들이 결혼에 대한 환상조차 거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그녀에겐 신념이 있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을 치유하는 법 정도는 가뿐히 터득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국민들의 칭송에 자신의 사랑이 하찮게 멈춰버렸다거나 무한히 절제한 것이 아니기를 빌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리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는 생각이면서도 말이다. 



 
                                                                                                                        -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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