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교수의 문단회고록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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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이들은 대학 재학 중에 영광스럽게도 추천받은 시인이다. 이때 문학청년들에게는 재학 중에 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은 부러운 사건이기도 했다.
홍희표군은 후에 중학교 교사로서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고향에 내려가 교수가 되었다.
박모 시인은 좋은 시를 줄기차게 써오다가 지금은 우리 시단의 확고한 자기세계를 구축한 대가이다.
나의 대학 시절에 유일한 문학청년이 박제천과 홍희표가 있고 그 다음에 정영일이었다.
나는 재학 중 대학신문 기자로 일했다. 어느 날 서대문의 인창고교 정문 앞에서 내가 서 있었는데 꽤나 이지적인 청년 하나가 다가왔다.
「이재인 형이지요?」
「?」
그는 덥썹 손을 내밀었다. 자기는 전남 신안에서 시를 쓰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보니 내가 소설 쓰는 냄새를 맡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나와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물론 나는 몸에 밴 겸손으로 잘해보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호기롭게 그의 시를 한편 달라고 했다. 「경대학보」에 실어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던 것 같았다.
그 후 그의 자취방을 나는 무시로 드나들었고 그와 함께 헌책방 순례를 다니곤 했다.
가끔은 정영일을 동행하여 미당 댁을 찾아갔다.
미당은 남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대한민국 문학청년을 끌어안는 대범성이 있었다. 그의 인간성과 천재성에 60년대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더욱이 당신은 무명인인 우리 문학청년들을 기억하고 작품 하나하나 살펴 주시곤 했다.
어느 날 사건이 마포의 미당 댁 부엌에 들어가 누군가 새벽에 큰일을 보았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전기불도 귀하고 마당도 드넓은 적산가옥이었던지라 술 취한 문학청년들 가운데 하나가 창고 같은 부엌에 큰 것을 하나 내놓았던 것이다.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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