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베트남, 나를 살린 베트남
베트남, 베트남, 나를 살린 베트남
  • 이재인
  • 승인 2006.06.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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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인교수의 문학회고록⑩


▲ 이재인 (경기대 국문학과 교수·소설가)

나와 베트남과 「악어새」소설
 나와 베트남은 남다른 감회가 있다. 만약 내가 베트남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면 과연 대학을 졸업할 수가 있었겠는가? 물론 인생에 가설을 적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를 무릅쓰고 베트남이 없었다면 나의 인생에 「소설가」란 이름과 「교수」라는 직분이 존재할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칠 무렵인 여름에 군에 입대했다. 등록금 뿐 아니라 책값을 비롯하여 쓸 용돈이 씨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는 친구들 여기저기에서 돈을 얻어다 썼지만 그것들도「코끼리 코에 비스켓」에 지나지 않았다. 에라, 「이 판에 군에나 가자」하면서 입대했다.

 논산에서 신병 훈련 42일을 마치고 부관 일반 병과 700을 받은 나는 다른 훈련병 두병과 함께 셋이서 보충대를 경유, 육군통신기지창으로 전속되었다. 여기에서 10개월 상등병을 붙이고 고달픈 졸병 생활을 하던 중 베트남 파병 차 모병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합덕에 고향을 둔 이명희 병장의 도움과 주선으로 강원도 오음리 교육대에 차출되었다.

 대략 50여 일간의 지옥 같은 전투 훈련을 마치고 퀴논에 있는 군수지원단 행정병으로 명령을 받았다. 여기에서 군사우편, 행정문서 수발을 관계하면서 미지의 베트남 여기저기를 탐색했다. 이는 소설을 쓰기 위한 소재 수집이었다.

▲ 베트남 종군시절의 필자 모습

 이러는 사이 1년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열대병에 치쳤다. 더욱이 한국에 두고 온 연인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그녀의 신변에 이상 징후를 내 동생이 귀띔해 주어 귀국을 서둘렀다. 제대 10개월 앞두고 서울 수색에 있는 00사단에 전투대대에 배속 받았다. 물론 행정사병으로 있었다.
베트남 소재를 소설로 엮기 위한 작업을 구성하기로 작정했다.
 장흥, 일영, 파주 화성 등 진지를 옮겨 다니면서 전쟁소설을 구성했다. 마지막 부대가 수원 근교 칠보산에서 제대명령을 했다. 물론 나는 대학교에 복학도 했다. 등록금은 베트남에서 받은 전투수당과 급여를 모아 이미 돈을 불린 바가 있었다. 시골의 아버지께서 내가 송금한 피같은 돈으로 송아지를 사고 키워서 어미소로 길러 부가가치를 한층 더 높여 놓았던 것이었다.

 이 소를 판 돈으로 방을 얻고 대학 등록금을 내고 살고 싶었던 여자와 결혼도 했다. 그리고 베트남 체험과 상상력을 섞어 「악어새」란 장편 소설을 썼다. 나의 기도대로 출판, 사흘 만에 기적같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섰다. 이윽고 6개월 만에 9만부가 팔려나갔다. 분명 기적이었다. 여기에는 매스컴의 힘도 컸지만 많은 사람들의 성원이 있었다.

 내가 클로즈업 되었다. 그것이 기회가 되어 대학 전임교수 자리가 마련되었다. 베트남은 나에게 남다른 감회와 감사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 세 번씩이나 베트남에 다녀오게 되었다. 젊은 날 귀한 체험을 꾀어냈다. 그 체험이 마침내 내 인생을 확 바꾸게 되었다고나 할까.
 
「사상계」와 장준하선생 내 영혼의 별
 내가 열여섯 이른 나이에 「사상계」잡지를 읽고 그 발행인에게 「고맙다」는 격려 인사 편지를 보냈다. 군사정권 하에 그 당시로는 소년으로서 그런 일에 용기가 있다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칭찬했다.
 당시 「사상계」는 국내 유일무이한 교양 시사지로서 이 나라 청년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는 역할을 했다.

 특히 이 잡지 서문은 발행인 장준하 선생이 쓰거나 주간, 편집위원이 쓰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의 글을 읽으면 막혔던 속이 후련히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미래가 없는 젊은이들을 향한 충고, 내일을 위한 꿈과 비전을 역설하는 이 「사상계」는 장안의 화제를 낳는 지성의 무기였다. 이러한 편집위원들의 이념과 시대적인 소명을 받은 대학생이나 지성인들의 욕구를 이 논설을 통해 해결하여 주었다.

 지금 내 머릿속에 기억되었던 당시의 좋은 글을 「사상계」에 쓰시던 신상초 안병욱 김형석 함석헌 양호민 김상협 유진오 장준하 선생은 그 시대의 지성과 현실의 리더들이었다. 그들이 뿌리고 내린 씨앗이 발아되어 오늘의 한국을 이룩했다면 누구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상계」의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던 여름 날, 청년인 나는 발행인 장준하 선생 앞으로 군사 정권하의 용기 있는 투쟁의 편지를 썼다. 일종의 팬레터였다. 존경한다, 앞으로 줄기차게 비판적 논설을 써 달라, 훌륭한 글들이다, 등등이 적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편지를 받은 장준하 선생은 내게 친히 답장을 보내왔다. 나는 감격한 나머지 그분을 즉시 찾아뵈러 당시 종로 2가 100번지 한청빌딩 3층을 찾아가 뵈었다.

▲ 베트남전쟁의 비극을 보여준 닉우드의 사진과 이교수의 인기작 『악어새』

 근엄한 얼굴에 인자한 모습이었다. 등 뒤로 가득 꽂힌 책꽂이, 곤색 양복에 검정테 안경에 커다란 사슴 같은 눈망울의 선생은 인상적이었다. 선생은 나에게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이분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그에 대한 존경과 신의도 무르익었다. 대학에 진학하여 인사차 사무실에 들렀다. 이 때 선생께서는 나에게 학업에 있어 책값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업무 부장인 장창하 선생을 불러 아르바이트로 정기 구독자 발송하는데 일을 돕게 하라 직접 지시하였다.

 그때 사상계 정기 구독자는 몇 만부가 되넘었다. 만부 가까이 되는 책을 발송하고 주소를 쓰는 일은 정말 즐거운 비명이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일을 하면서 적잖은 장학금을 타다가 쓰기도 했다. 장준하 선생은 후에 국회 국방위원이 되어 군에 있는 나에게 격려 편지를 보내신 것이 부대장에게 밝혀져 특별 휴가를 강제로 보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선생님이 국회위원으로 옥중 당선 후 국가에서 지급한 관용차를 반납하시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 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아련하다.
 선생님은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비서로 일하신 바가 있다. 그리고 신앙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이분의 사랑과 격려를 많이 받았다. 나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선생의 가르침이었다.

 장준하와 오영수와 정태영 이 세분은 내 정신적인 스승으로 오늘도내 영혼에 하늘에 별로 떠 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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