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간에 함께 있어도 그 의미는 다르다. 완벽한 객관이란 없다. 입성한 주체가 누구인가, 누가 다수인가에 따라 공간의 의미는 변화하고, 다르게 감각된다. 공간을 주어로 두고 말하자면 그건, 공간이 침입자를 가려가며 몸을 바꾸고, 밀어내고, 공격해 오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에게 쉼의 공간인 ‘집’은 어떤가. 주부에게는 끝없는 노동의 일터이고, 가정 폭력 생존자에게는 발을 디딜 때마다 언제고 ‘폭탄’이 터질지 모를 불안한 전쟁터다.
퀴어 아티스트인 이반지하에게도 오랜 시간 집은 편안한 장소가 아니었나보다. 그래서인지 그는 세 번째 에세이인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의 문을 이렇게 열며 자문한다. 자신은 평생을 ‘집’에서 도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나, 평생을 집에서 도망치며 살고 있나.
어릴 때는 가족을, 주고받는 숨을,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 집에서 도망쳤다.
꼼짝없이 다 커버린 다음에는 애인의 폭언과 화를 피해 집에서 도망쳤다.
손댈 엄두가 안 나는 구질구질한 살림살이와 생활, 인생이라는 폭탄을 잠시라도 망각하기 위해 수없이 집에서 도망쳤다.” <9~10쪽>
공간이 자신을 밀어낸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다. 남보다 배의 힘을 들여 안간힘으로 나를 밀어내는 세계를 버텨내는 것. 혹은, 도망치는 것. 많은 사람들이 버티기를 하다가 몸과 마음을 다친다. 그러다 도망친다. 그러니 이건 선택인가, 어쩔 수 없는 떠밀려가기인가.
부조리한 사실은 이런 일은 대체로 사회가 만들어낸 ‘정상성’ 바깥의 몸들에게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목록은 짧지 않다. 퀴어, 여성, 장애인, 이민자, 무취업자, ‘히키코모리’, 지병이 있거나, 가난한 이들... 이 사회는 ‘정상’이란 한줌의 세계 밖의 무수한 존재들을 이 ‘버티기’와 ‘도망치기’라는 좁은 선택지에 가둬놓은 셈이다.
“퀴어 예술가이자 노동자, 일인 생활자”인 이반지하는 그러나 문득 생각한다. 매번 멀리 도망쳐야 하는 삶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고. 그가 그답게 살아가는 건 “사방에서 비수처럼 날아오는 혐오를 견뎌내는 일”인데, 계속 도망가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매번 수비를 하고 있었다. 한번도 공간을 향해 공격적인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살뜰히 준비해 쳐들어간다거나, 여러 조건을 두루 보고 여유 있게 선택해 골라내는 입장이 아니었다. 단지 이전 공간에서부터 떠밀리고 쳐밀려온 곳이 지금의 공간이 되었다. 이 공간 역시 종국엔 나를 밀어낼 것이었다. 그래서 공간은 언제나 닥쳐오는 것이었다. 이쪽 사정을 봐주며, 어르거나 달래면서 와주지 않는다.” <11~12쪽>
책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는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다/없다’등의 소모적인 싸움을 떠나, 공간에 “떠밀리고 쳐밀려”버린 이가 다시금 세계의 공간에 '침투'해 박탈 당한 공간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서문에서 언급한 집을 넘어, 호텔, 대중교통, (헤테로의)결혼식장, 편의점, 공공도서관, 길거리, 제주도, 글로벌 프렌차이즈 까페(“으타벅스”) 등을 오가며.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장소들이 이반지하의 몸이 되어 걸어보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예컨대 ‘무해함과 지식의 전당’으로 인식되는 공공도서관이란 작가에게 어떤 공간이었던가. 도서관 강연을 준비하던 이반지하는 갑작스럽게 강연이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는다. 사유는 그가 강연에서 말할 ‘퀴어’라는 주제가 부적절하다는 민원 때문. 그러나 곧, 이 처사가 잘못됐다는 또 다른 민원이 들어오자 강연은 ‘다행히’ 재개된다. 하지만 조건이 붙었다. 퀴어 아티스트의 강연에서 ‘젠더, 동성애, 퀴어’라는 단어는 빼라는 것.
비극(?) 같은데 웃기고, 웃긴데 생각할 게 많아지는 경험은 공간을 타고 변주된다. 그렇게 이반지하의 몸이 되어 책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독자는 알게 된다. 안간힘으로 버텨야 해서 매번 흔들리던, 길을 걷는 동시에 도망칠 곳을 고민하면서 걸어야 해 휘청거리던, ‘헛걸음이라고 생각했던 걸음’들마저 사실은 걸음이었다는 걸.
말하자면 이 책은 헛걸음을 ‘예술’로 만들고, 암묵적으로 빼앗겼던 공간을 되돌리는 이반지하의 또 다른 행위 예술이다. 또한 공간 상실자들에게 공간을 침투할 힘을 주고, 새로운 공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숨 쉴 공간이기도 하다. 벌써, 11월이다. 올 한 해도 사회가 구획한 정상성의 틀에 끼인 채로 제대로 도망치지도 버티지도 못하고 있는 기분으로 보내는 이가 있다면. 그래서 스산한 이 시기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면. 이 책을 펼쳐보자. 지지부진한 이 걸음도 걸음이었다고. 이 헛걸음이 모여서 웃기고도 아름다운 책이자 춤이자 투쟁이자 삶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책을.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