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리의 그림책 이야기] 지금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이루리의 그림책 이야기] 지금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 이루리 작가
  • 승인 2024.10.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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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작가님의 소천

사슴 작가님의 카톡으로 사슴 작가님이 소천하셨다는 부고 문자를 받았다. 잠시 숨을 쉴 수 없었다.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전에도 사슴 작가님의 카톡으로 작가님이 병원에 있다는 문자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슴 작가님의 카톡은 오래전부터 남편분이 대신 보내주고 있었다.   

사슴 작가님을 만난 것은 창작 그림책을 만드는 워크숍에서다. 벌써 7년 전 일이다. 지금보다 내가 7년이나 더 미숙할 때였다. 사슴 작가님은 그림책을 볼 때 사슴처럼 눈이 반짝였다. 어느 날 사슴 작가님은 용기를 내어 콘티를 제출했다. 칭찬과 응원이면 충분했을 텐데, 나는 뾰족한 말로 상처를 드렸다. 그 후 사슴 작가님은 콘티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사슴처럼 다정하게 다른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감탄해 주었다. 사슴 작가님은 워크숍을 마친 뒤에도 도서전마다 출판사 부스를 찾아와 응원해 주었다. 

어른이 동물로 변한 세상

『안개 숲을 지날 때』 표지

『안개 숲을 지날 때』의 주인공 ‘나’는 발 좀 들어보라는 청소부 두더지에 말에 잠이 깼다. 깃털역에서 내렸어야 하는데 종착역까지 오고 만 것이다. 주인공은 가방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깜깜했다. ‘나’는 서둘러 기차에서 내렸다. 이윽고 그림에서 주인공이 보였다. 청소부는 두더지인데 주인공 ‘나’는 사람 어린이였다. 살짝 소름이 끼쳤다.
  
그림책 『안개 숲을 지날 때』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어른이 동물로 변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어린이의 이야기를 보여 준다. 주인공 어린이는 이미 그런 세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듯, 동물 어른들과 아무렇지 않게 소통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관심은 온통 늑대 부부 가정에 입양된 동생을 만나는 것이다.  

『안개 숲을 지날 때』 속 한 장면. [사진=봄볕]

그런데 왜 어른만 동물로 변한 것일까? 어린이는 왜 그대로 사람인 것일까? 과연 주인공은 동생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조차 안개 숲에서는 길을 잃어버린다. 짙은 안개와 어린이와 사슴과 돼지와 여우의 이미지가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안개 같은 그림 속에서 어린이와 사슴과 돼지와 여우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온다. 

아이스크림을 사랑하는 어른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내 사진은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어딘가에는 프로필 사진으로도 올려놓았다. 성인병 환자인데도 내가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인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몇 해 전 사슴 작가님이 카톡으로 아이스크림을 선물해 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사슴 작가님이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남편분이 알려주었다. 

병원은 호스피스 병원이었다. 사슴 작가님은 너무나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사슴 작가님보다 문병 간 내가 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나 말고도 문병 온 분들이 많았다. 모두 남편분의 연락을 받고 왔다. 사슴 작가님은 우렁각시 같은 남편분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사람이라는 가면을 벗고

『안개 숲을 지날 때』 속 한 장면. [사진=봄볕]

지금 이 혼란스러운 도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본성은 저마다 다른 동물인데, 사람이라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을 아닐까? 어린이처럼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동안에는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된다면 이제 본성대로 살면 될 것이다. 

『안개 숲을 지날 때』는 절망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희망의 유토피아다. 어른은 어른대로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세상의 모든 어린이는 차별 없는 돌봄과 교육을 받는다. 이별하지만 다시 만날 수 있고, 사랑하지만 구속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상적이다. 

본성대로 그림책을 사랑하던 사슴 어른이 세상을 떠났다. 집에 있던 이천여 권의 그림책 가운데 천여 권은 이미 기증되었고 남은 그림책도 곧 새 주인을 찾을 것이다. 우렁각시 같은 남편분이 사슴 작가님의 그림책 사랑을 널리 전하고 있다. 남편분도 곧 사슴이 될 것 같다.

『안개 숲을 지날 때』
송미경 지음 | 장선환 그림 | 봄볕 펴냄 | 104쪽 | 20,000원 

이루리(작가/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이루리(작가/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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