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마종기, 「정신과 병동」
[시민 시인의 얼굴]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마종기, 「정신과 병동」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10.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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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비 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은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
몇 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는 스물한 명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가는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품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구석마다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스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제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 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도
지겹지 않고,
가운 입은 삐에로는 비 오는 것만 쓸쓸하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마종기, 「정신과 병동」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말은 도스토옙스키 『백치』에 흐르는 테마입니다. 백치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사는 사람을 아름답게 그립니다. 바보 같은 그대가 나를 구원한다고. 믿기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의 화신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마종기입니다. 의사며 시인입니다. 그는 인간의 몸과 마음 모두를 구원할 것만 같습니다. 시가 나를 구원하리라 여긴 적이 있습니다. 마종기도 시가 사람들을 위로할 것이라 말합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 상처받은 인생이 위로받은 듯 기쁘니 괜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 「정신과 병동」은 1963년 쓴 것으로 김수영이 「1963년 시단 총평」에서 극찬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시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위로하고 마침내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정신과 병동에 흐르는 시간은 병원 밖과 다르네요. 지금은 가을인데 봄 다음에 겨울이 온다니 말입니다. 고시생과 화가 지망생은 본분을 잊고 이치에 닿지 않은 말을 합니다. 더 이상한 것은 시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제자리에 돌아왔다’고 하네요. 그리고 미몽에서 깨어났다고 진단하네요.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으라’고 소리치며 세상과 결별하였습니다. 시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위로도 구원도 없을 것 같습니다.

김수영은 마종기에게 문단 중심에 가지 말라 소매를 끌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아름다운 시를 쓰지 말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실제 마종기는 1965년 공군사관학교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한일 굴욕외교 반대 재경 문인 82인 서명’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미국으로 추방되듯 이민을 갑니다. 그 후 미국 교포 시인으로, 의사로 향수에 젖어 지냅니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정신과 병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하리라는 자기연민이 시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절대자처럼 ‘이제 모두들 깨어났다’고 증언합니다.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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