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야구팬들에게 간절한 계절이다. 이름 하나만큼은 낭만적인 ‘가을야구’는 10개 팀 중 정규리그 상위 5위권에 든 팀에게만 허락되고, 절반은 떨어지는 꽤 잔인한 싸움이다. 가을야구에 가느냐 못 가느냐, 그 기로에서 팬들은 환호하고 때론 절망한다. 그리고 올해 들어 주변에 야구를 챙겨보기 시작한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JTBC ‘최강야구’를 통해서든, 친구나 연인을 통해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야구에 갓 입문한 뉴비 팬들이 많아진 걸 몸소 실감할 수 있는 요즘이다.
갖춰야 할 장비도 많고 룰도 복잡한 야구가 어떻게 해서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게 됐을까? 그리고 왜 축구가 아닌, 야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가 됐을까? 책 『야구의 나라』는 이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해, 그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2000년대 야구가 국민 스포츠가 된 과정까지를 추적해 온 저자는 책을 통해 스포츠가 단순히 자본이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도네시아의 배드민턴이나 인도의 크리켓처럼 한국이 야구의 나라가 된 데에는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녹아 있다. 다른 모든 사회 분야처럼, 스포츠 역시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야만 그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데,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야구의 나라』는 스포츠 분야를 조망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스포츠가 민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극일(克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야구는 식민지 조선에 적합하지 않았다. 조선 민중들은 야구 경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팀이 결국에는 승리하는 야구 경기를 굳이 돈을 내고 지켜봐야 할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레 야구는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스포츠’로 치부됐고,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야구는 태생적으로 국민 스포츠가 되기엔 불리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의 ‘민족’ 스포츠는 누가 뭐라 해도 축구였으니. 반면 야구는 일본이 만든 엘리트 학교에서 행해지던 전형적인 ‘금수저’, ‘귀족’ 스포츠였고, 당시 조선인들이 하기엔 진입장벽이 높은 스포츠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야구는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식민 지배로 인한 필연적인 열등감을 보여주는 종목이었지만, 야구를 잘한다는 건 엘리트로 인정받는 길이였고, 또한 일본인의 스포츠인 야구로 일본을 누르면 그만큼 딸려오는 카타르시스도 컸다. 1923년, 전원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휘문고보 야구팀이 고시엔 본선 8강에까지 이르렀을 때 많은 조선인이 관심을 가지고 목청 터지게 휘문을 응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4대 일간지는 자사의 이익을 위해 고교 야구 대회 관련 기사를 한 달 전부터 끊임없이 양산했다. 이 시기에 고교 야구 대회 결승전 관련 보도는 4대 일간지 1면부터 크게 다루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통해 스포츠와 관련된 갖가지 정보를 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1970년대에는 고교 야구에 관련된 정보를 사실상 4대 일간지가 독점하고 있었다. 고교 야구 팀의 역사, 올해 전망이나 유망주 소개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4대 일간지를 봐야 했다.
해방 이후에는 어떨까. 미군정을 겪으면서 야구는 일본의 스포츠가 아닌 미국의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더 이상 야구가 눈총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만들어진 명문교들은 다시 야구를 통해 존재감을 알렸고, 엘리트 출신들이 주축이었던 신문사들은 앞다퉈 고교 야구 대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교들의 경쟁은 볼거리가 됐고,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이주민들의 향수를 달래주곤 했다.
이처럼 한국 야구의 성장 과정은 드라마틱하다. 일본의 귀족 스포츠로 외면받다가 한국 최고의 스포츠가 되는 과정은 놀라운 역전극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야구를 최고의 스포츠로 만들었던 여러 요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 과정들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가 보인다. 야구가 단순히 스포츠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역사적·문화적·정치적 맥락이 집약된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지금, 한국 야구의 문화에는 또 다른 변화가 일고 있다. MZ세대는 스포츠 관람 방식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며, 야구를 스포츠 경기 관람의 차원을 넘어선 종합적인 문화 경험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야구가 다양한 문화와 결합해 지속적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활발한 팬들과의 소통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책은 이렇게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사회의 이면을 야구라는 맥락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이 흥미로운 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하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그뿐인가, 거기에 야구를 즐기는 눈을 가지게 되는 건 덤이다.
[독서신문 이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