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페에 자주 가지 않는다. 카페에서 사람 만날 일이 드물기도 하지만 혼자 카페에 가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MZ 세대의 카공족을 따라 해보겠다고 노트북을 들고 혼자 카페에 앉아 보았지만 30분을 못 버티고 나오고 말았다.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패드를 들고 공부를 하고 글을 쓰는 일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내가 유럽의 도시에서 보았던 카페의 모습을 한국서 찾는 것이란 허망한 꿈이란 것도 알았다.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단골이었던 카페 드 플로르, 헤밍웨이와 카뮈, 조이스가 작품 구상과 휴식을 위해 자주 찾았던 레 듀 마고, 1686년에 문을 열어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는 이제 별다방과 콩다방에 익숙해진 우리의 일상과 너무 먼 곳에 떨어진 유럽의 카페로만 남고 말았다. 몇 해 전 볼로뉴를 시내를 걷다가 자그만 카페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노년의 남자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쭙잖은 스트리트 포토를 한 장 찍은 것인데 다행히도 그의 얼굴이 초상권에 침해될 정도가 아니어서 인스타에 올렸다. 나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그가 부럽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여유롭게 신문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삶의 여유보다도 글 읽기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준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할 때 나의 목표는 연구논문이나 글을 잘 쓰는 것보다는 조금 더 나은 독자가 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책 읽기보다는 더 깊이 있게 읽어야 최소한 학문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그 생각은 글 읽기를 또 하나의 학문적 방법으로 착각한 오만이었고 교만이었다. 독서란 지식을 쌓는 것보다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자기식대로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때 한국의 평론계를 휩쓸던 한 프랑스 문학자가 책 읽기의 괴로움을 토로한 것은 대중의 괴로움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괴로움을 토로한 것일 뿐이다. 독서가 직업이라면 어찌 쉽고 즐거울 수만 있겠는가. 그러나 독서가 취미도 일도 아니고 자신의 일상의 일부인 사람은 독서를 생계 수단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즐거움을 얻게 된다.
최근에 쇼펜하우어에 관한 책을 한 권 냈다. 쇼펜하우어도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는 독서법은 매우 간단하지만 근엄하다. 고전을 선택하여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라는 것이 그의 독서법의 전부이다. 우리는 이 말을 어려서부터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당위에 대한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말도 그렇게 흘려듣고 만다. 우리는 이제 이 말을 다시 되새겨볼 때를 맞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독서법은 고전과 반복이란 키워드로 구성된다. 독서란 저자와 출판인, 그리고 독자라는 유기적 관계로 구성되며 모두가 더도 덜도 없이 중요하다. 최근에 한 언론사는 우리의 출판 상황을 밀란 쿤데라를 오마주 하여 참을 수 없는 베스트셀러의 가벼움으로 단정하였다.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이 이제 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출판사만 탓할 것인가? 더 이상 가벼워지려야 가벼워질 수 없는 가벼움을 독자들이 참아내고 있는 것은 어찌할 것인가? 다시 쇼펜하우어 독서법의 고전과 반복이 눈앞에 어른댄다.
쇼펜하우어의 독서법을 따른 진정한 독서가를 들자면 몽테뉴가 단연 으뜸이다. 물론 몽테뉴는 쇼펜하우어보다 세상을 먼저 살다 간 사람이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몽테뉴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고등법원의 법관이 되지만 아버지와 친구 라 보에시의 죽음을 겪은 후 법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몽테뉴 성 안의 탑 건물을 서재로 만든다. 그 공간은 그때까지 성 전체에서 가장 쓸모가 없는 공간이었으나 몽테뉴는 그곳을 가장 중요한 독서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그 건물의 대들보마다 54개의 라틴어 격언을 새겨 넣었다. 그 마지막이 유일하게 프랑스어였는데 그것이 바로 크 세-쥬?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였다. 몽테뉴가 그 서재 안에서 독서를 통해서 탐구한 것은 국가나 가족, 시대, 상황, 돈, 소유 등에 매달리지 않는 자신의 참된 자아였다. 괴테가 치타델레Zitadelle라고 불렀던 내적인 자아, 아무도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자아를 탐구했다. 이를 위해 몽테뉴는 고등 법관이라는 공직에서 물러나 그 만의 서재로 들어갔고, 불필요한 관계들로부터 물러나 그 만의 치타델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치타델레에서 구현한 몽테뉴만의 자아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상록』에 모두 기록된 것이다. 몽테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즉 자기 자신으로 살기, 점점 더 자유로워지기를 죽을 때까지 시도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허영심과 자부심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으며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바로 몽테뉴의 글쓰기에 모두 녹아있는 것이다.
이즈음에서 우리 주변의 책과 독서법을 한 번 되돌아보자. 참을 수 없이 가벼움의 책들을 읽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은 그 가벼움을 참을만 한지. 모든 것이 코딩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버공간에서 디코딩 되는 우리의 현실에서 아직도 책과 책 읽기 만큼은 아날로그적인 계산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나의 믿음은 언제까지 지속될는지. 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차라리 나도 지금부터라도 몽테뉴처럼 나만의 치타델레를 짓기 시작하는 게 낫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