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존 던(John Donne)을 아시나요: 심연수, 「눈보라」
[시민 시인의 얼굴] 존 던(John Donne)을 아시나요: 심연수, 「눈보라」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9.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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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바람은 서북풍(西北風)
해 질 무렵의 넓은 벌판에
싸르륵 몰려가는 눈가루
칼날보다 날카로운 이빨로
눈 덮인 땅바닥을 갈거간다.

막막한 설평선(雪平線)
눈물 어는 샛파란 공기
추위를 뿜는 매서운 하늘에
조그만 햇덩이가
얼어 넘는다.

-심연수, 「눈보라」

존 던(John Donne)을 아시나요

16~17세기 영국은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다졌던, 소위 ‘엘리자베스 시대’라 불렸던 빛나는 시절이었습니다. 문화 예술에서도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시대였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린 대문호의 시대에 또 다른 시인이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T. S. 엘리엇입니다. 20세기 모더니스트인 그가 영국 문학의 또 다른 시조새를 발굴한 것이지요. 바로 존 던입니다. 셰익스피어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오랜 세월 잊혔던 인물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인간 존재의 문제를 작품에 담았다면 존 던은 인간 삶을 신의 차원으로 끌고 갔습니다. 어쩌면 드러나지 않은 인간 본질을 더 신랄하게 살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940년대 우리는 가장 참혹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우리말과 글과 이름을 빼앗긴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윤동주가 등장합니다. 그는 한반도를 떠나 저 먼 나라 만주 땅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애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윤동주와 비슷한 공간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시인을 아시나요. 심연수입니다. 그는 강릉에서 태어나 러시아로 만주로 쫓겨갔던 유이민의 후예입니다. 둘은 모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요절합니다. 윤동주는 일본의 마수에 걸려, 심연수는 괴한의 총탄에 쓰러집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너무 차이를 보입니다. 윤동주는 민족시인, 저항 시인의 면류관을 쓰고 부활했지만 심연수는 이름 없는 시인으로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어둠 속을 헤매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시대는 한 사람만을 기억하지 않듯이 우리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한 사람만이 빛났던 것은 아닙니다. 시 「눈보라」는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칼을 에이는 추위와 앞을 볼 수 없는 눈보라에 갇혀 있습니다. 심연수의 시는 그 공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면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장소애(場所愛)가 눈물겹습니다. 역사의 악몽을 뚫고 우리 삶을 새로운 역사 속에 가져다 놓는 일은 셰익스피어와 윤동주의 몫이 거대하지만 존 던과 심연수의 존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중합니다. 심연수를 아시나요.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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