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인간 두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또한 두뇌는 언어를 통하여 발달한다. 언어 역할은 소통이다. 이때 언어를 가려서 사용하자는 주문을 해본다. 왜냐하면 혀로 타인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고, 또한 말 한마디로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는 일을 주위에서 종종 보아와서다.
평소 세종대왕님이 창제한 한글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분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 언어 수준이 그렇다. 모르긴 해도 이분들 어학 실력은 D학점 아니면 F학점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다행스러운 것은 언젠가 야당 당수가 글을 썼던 작가인지라 그분 입을 통해서 다소 언어 순화가 있었기를 감히 기대해 본다.
날짐승과 길짐승에게도 언어가 있다. 식물도 감정을 가지고 있잖은가. 코끼리들은 자기들끼리 통하는 언어를 지녔다. 거대한 코끼리들이 킬리만자로 산 앞을 통과할 때 인간 귀로는 들을 수 없을 만큼 조용히 지나간다. 이때 코끼리가 1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코끼리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초저주파 음을 이용해서 소리를 내기 때문인데, 인간 귀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멀리 고요히 울려 퍼진다고 한다.
식물도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 잎사귀를 바늘로 찔렀을 때와 불로 태웠을 때 따뜻한 햇볕을 받았을 때, 그리고 비를 맞았을 때 반응이 각각 다르게 나타난 것을 탐지기로 발견하였다. 거짓말 탐지기 전문가인 백스터가 다년간 연구한 결과물이다.
만약 지구상 존재하는 뭇 길짐승 날짐승들이, 우리 인간이 알아차릴 수 있는 언어로 인간들처럼 욕지거리를 하고, 싸움질하고, 뛰어다니고, 날아다닌다면 과연 세상은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친다.
우리 한글보다 이 세상에서 더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는 언어가 있을까? 가족 간 언어, 연인 사이 언어, 스승과 제자 간 언어, 정치인과 비정치인 언어, 정부와 국민 간 언어에는 각각 적합한 품격이 있기에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는 것이다.
『바다와 노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작가 헤밍웨이는『무기여 잘 있거라』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39번이나 고쳐서 썼다고 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도 이렇듯 퇴고를 거듭했으면 좋겠다.
여자 셋만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한다. 흉보며 닮는다는 말도 있다. 모두가 말조심하라는 격언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표리부동함이 만연하는 세태다. 무한 경쟁시대 속성상 영원한 동지는 없다. 그래서 말이 지닌 중요성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좀 색다른 얘기를 해보자.
평소 필자를 잘 아는 문인과 퍽 가까이 지내는데, 느닷없이 호를 지어 보냈다. ‘가두사’라는 호다. 무슨 뜻일까? 어리둥절했다. 한자로 표기했다면 얼추 짐작이라도 해보련만, 한자어는 아닌 듯싶다. 사전을 찾아봤다. 없다. 한국군으로 미군을 도와 미군과 같이 국방에 임하는 카투사는 있다. 이건 아닌 성싶다. 어휘 사용이 정확한 분이니 오, 표기를 할 리가 없다. ‘한정된 곳에 집어넣어 자유로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다.’의 뜻을 가진 타동사로 ‘가두다’라는 기본형이 있다. 순간 기분이 좀 이상해진다.
필자가 바깥으로 나도는 성미도 아니려니와 설령 그렇더라도 그런 닉네임을 달아줄 사람이 역시 아니다. ‘가두리 양식장’인가? 저 먼 남쪽 어느 땅 끝 마을 가두리 양식장에 구금된 채 주는 떡밥이나 받아먹고, 피둥피둥 살이 오른 물고기처럼 오동통 속살을 달고 다닌다고 그래서 붙여준 호인가. 이건 너무 지나친 비약이다.
“탁류 속 같은 세상인데, 당신은 정말 귀한 글쟁이야. 욕심도 부리지 않고, 순수문학만 지향하잖아. 소신 있고, 원칙을 중시하고, 의와 정을 아끼는 인품에 딱 맞는 호이니 받아주게나.”라며 지어준 호 ‘가두사’보다 그의 부연 설명이 더 이색적이었다. 한편 이 말에 당황스러웠다. 글쟁이들이 흔히 갖는 호로써 나는 하정 아닌가.
아름다울 가(佳) 콩두(豆) 하여금 사(使). 장수 식단에 좋다는 콩을 예쁘게 키우는 정성으로 오직 가족만을 위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가두사’의 뜻은 엉뚱했다. 그의 왈,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을 축약했다는 의미 때문이었다.
그 말에 옛 속담이 문득 떠올랐다.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타인의 행복 속에서 나의 행복을 맞본다는 뜻이다. 불행한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가 불행해지는 법인데, 사회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으로 돌아오게 되는 터, 그러므로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란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삶 속에 좋은 인연은 필수적이다. 오죽하면 통장의 많은 액수보다 좋은 인맥이 더 귀하다고 했을까. 그러나 인간관계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대인관계도 꽃밭의 꽃처럼 정성껏 가꿔야 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베풀기만 바란다면 이는 잘못된 계산이다. 내가 먼저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정을 나눠야 상대방도 이에 응수한다. 인간관계도 상대적 아니던가.
요즘 지인이 예쁜 글씨로 한지에 묵서해 준 <가두사>를 내 수필집『예술의 옷을 입다』의 갈피 속에 2등분으로 접어서 끼워 놓았다. 그리곤 시간 날 때마다 이것을 펼쳐서 읽곤 한다.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으면 먼저 <가두사>를 묵상한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이 언어로 나를 호칭하길 바람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