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곤비(困憊)한 혼(魂)들의 여윈 발자국을 지키는: 김동명, 「수선화」
[시민 시인의 얼굴] 곤비(困憊)한 혼(魂)들의 여윈 발자국을 지키는: 김동명, 「수선화」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9.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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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그대는 차듸찬 의지(意志)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孤獨)의 위를 날르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사라 또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부칠곧 없는 정열(情熱)을
가슴 깊이 감초이고
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寂寞)한 얼골이여!

그대는 신(神)의 창작집(創作集)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不滅)의 소곡(小曲)

또한 나의 적은 애인(愛人)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水仙花)야

- 김동명, 「수선화」

곤비(困憊)한 혼(魂)들의 여윈 발자국을 지키는

우리 가곡 중 즐겨 부른 노래가 있지요. 「파초」, 「내 마음은」입니다. “조국(祖國)을 언제 떠났노/파초(芭蕉)의 꿈은 가련하다.”, “내 마음은 호수요,/그대 노 저어오오.”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 가사는 김동명의 시입니다. 우리 문학사를 쥐락펴락했던 백철, 조연현은 김동명을 ‘자연적, 목가적, 전원적인 시인’이라 규정한 바 있습니다. 그 후 그는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 연구자들이 최근 그를 다시 보려 합니다. 낭만적 상상력과 현실적 상상력을 두루 갖춘 시인으로 말입니다. 그만큼 김동명은 식민지 시대에 갇혀 있습니다. 그가 해방 이후 보였던 다양한 행보는 잘 드러나지 않지요. 저항적이며, 정치적 면모 말입니다.

시 「수선화」는 초기 시에 속합니다. 역시 김동진이 가곡으로 곡을 붙였지요. 일설에는 1930년대 후반 함흥 영생고보에 교사로 같이 근무했던 백석을 두고 썼다고 합니다. 백석은 당시 “나는 시와 결혼했다.”할 만큼 시심이 굳센 시절이었습니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라고 속삭입니다. “부칠곧 없는 정열(情熱)을/가슴 깊이 감초이고/찬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寂寞)한 얼골”로 말입니다. 그 모습을 김동명도 지켜보았겠지요. 눈에 선합니다. 그처럼 백석도 김동명도 ‘죽었다가 다시 사라 또다시 죽는’ ‘불멸의’ 시인입니다.

김동명은 1923년 『개벽』에 「당신이 만약 내게 문(門)을 열어주시면」 등을 발표하며 시를 씁니다. 이 시에 부제가 있는데, ‘드레르에게’입니다. 보들레르를 추앙하여 썼지요. 그래서 스스로를 보들레르처럼 ‘카인의 후예’와 같은 반항아라 여겼지요. 그때 소위 데카당스한 퇴폐미를 추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보들레르에게서 형제애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보들레르를 ‘버림을 당한 곤비(困憊)한 혼(魂)들에 여윈 발자국을 지키고 있는/님’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알지요. 그처럼 김동명도 버림받은 타자들의 고단한 영혼을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파초의 꿈’도, “나는 그대의 힌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내 마음은」에서)”라는 마음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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