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최선을 다하지 마라"...76세, 호탕한 할머니의 사는 방법
[책 속 명문장] "최선을 다하지 마라"...76세, 호탕한 할머니의 사는 방법
  • 유청희 기자
  • 승인 2024.09.13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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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나는 대부분의 문인들을 좀 엄살이 많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개중에서도 시인들이 제일 엄살이 심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감정만 너무나 소중한 나머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필 여유가 없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를 문학애호가 정도로 생각하고 직접 뭔가를 써서 발표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통 하지 않았던 것은, 엄살을 부려 내 감정을 증폭시키는 자세가 안 되어 있다 보니 글을 쓰고 보면 그렇게 메마를 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8~9쪽>

글을 쓰면서 나이를 먹어야 알 수 있는 것들도 있고, 또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젊은 사람을 대변하는 글들이야 차고도 넘치지만, 그냥 보통의 주부 노릇을 오랫동안 해온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도 뭔가 할말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11쪽>

나는 남편의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의외로 손위 동서는 다른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 그날 제사를 끝내고 음복주에 취해 옆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남편도 없이, 오밤중에 빙글빙글 도는 우주로 통할 것 같은 부산항대교를 지나면서 "나는 자유다!"라고 크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마음만 그렇게 했다. <22~23쪽>

한국의 여자들은 너무 똑똑하고 교육도 다 잘 받았다. 사태 파악이 빨라 비혼자도 늘었다(남자 잘못 만나 인생 망한 여자는 있어도 안 만나서 망한 여자는 없단다). <26~27쪽>

이 나이는 내가 나의 몸과 타협해야 하는 시기이다. 다행히 아직 크게 구체적으로 아픈 곳은 없다. 친구들이 말하기를, 메이커 있는 병만 없으면 아직 괜찮단다. <29쪽>

시몬 드 보부아르도 바보 중의 상바보 노릇만하고 자신의 어린 여자 제자들을 사르트르가 쉽게 데리고 놀다가 버리는 걸 거의 도운 꼴이라니. 게다가 낭비벽이 있던 사르트르가 재산도 별로 안 남기고 죽었는데, 보부아르 몰래 젊은 애인을 양딸로 입양해둔 바람에 그의 사후에 판권도 하나 물려받지 못하고 빈손만 털었다니 내가 참 빡이 쳐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네.  <43쪽>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기대 없이, 스스로의 명랑성과 가벼운 마음가짐(평온함)에 기대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지구 한 귀퉁이에서 덤덤하고 조용하게 사는 즐거움을 저렇게 요란한 유명인들은 모를걸! <49쪽>

생각해보면 나는 참 운 좋게도 그냥저냥 평탄하게 살아온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겪었을 여러 인생살이와 이런저런 사건사고와 경제적 결핍과 허약 체질과 남편과의 불협화음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 다만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는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으며 지금까지 먼 길을 온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한다.  <213~214쪽>

나의 장례는 그 시기의 일반적인 방법으로 할 것이며 화장해서 유골은 너희 아빠를 장사 지낸 것처럼 하고, 제사 지내지 말고 그날 시간이 나면 너희끼리 좋은 장소에 모여서 맛있는 밥을 먹도록 해라. 또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너희 아빠는 꽃 피는 봄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단풍 드는 가을에 떠나면 좋겠네.

그러면 너희는 봄가을 좋은 계절에 만날 수 있을 테니. <73~74쪽>

『즐거운 어른』
이옥선 지음 | 이야기장수 펴냄 | 248쪽 | 1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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