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현대식 교량(現代式 橋梁)을 건널 때마다: 박태진, 「나는 한국사람」
[시민 시인의 얼굴] 현대식 교량(現代式 橋梁)을 건널 때마다: 박태진, 「나는 한국사람」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8.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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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요, 나는 한국사람

그러나 이조(李朝) 때에 살지 않습니다

구한말(舊韓末)도 벌써 벗어 버렸습니다.

그 시대를 멋으로 알 정도로

그 시대를 꿈으로 여길 정도로

나는 옛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한국인임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중학 때 일군교관(日軍敎官)의 매서운 매질에서

대학 때 일군으로 중국에 강제로 끌려가

815로 상해(上海)에서 돌아오는 피난선에서

해방 뒤 우리의 무능과 무기율(無紀律)에서

625로 부산에 피난가든 참상에서

 

이 경험들이 내 오늘에 살아있기 위하여

그러한 한국인이 다시 되지 않기 위하여

역사를 알고서 비분 개탄하기 위하여

팝송 노래를 그런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정치가의 야담식 행상을 알고 속기 위하여

38선의 사연을 다시 알고 속기 위하여

 

한때 실조(失調)의 유학이 물러가던

개화(開化)는 오늘도 그렇다는 본뜻의 낱말

1988년이 벌써 탈피를 꿈틀대는 서울거리

여기 씨뿌리는 낱말 몇줌이 내 물려줄 유산

그러나 지성은 타일 손질의 땜질이 아니란다

아,역사여 같은 실수를 말라

 

더 이상 얼치기 꿈의 한국사람이기에는

내가 겪어 온 혼돈의 사연들을 잊기에는

나의 현실을 서랍 밑 먼지속에 묻기에는

달빛 보며 한 잔 술에 취해버리기에는

예술이 단골 선술집의 화제로 그치기에는

아니, 좀더 심각해야죠, 나는 한국사람.

- 박태진, 「나는 한국사람」

현대식 교량(現代式 橋梁)을 건널 때마다

김수영은 시「현대식 교량」에서 “현대식 교량(現代式 橋梁)을 건널 때마다 나는 갑자기 회고주의자(懷古主義者)가 된다”고 반성합니다. 왜 그는 현대성에 목을 매었으면서도 현대식 교량으로 표상되는 첨단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게 될까요. 그 궁금증을 박태진에게서 풀어 볼까 합니다. 박태진은 전후 시인 중에서 김수영이 진정한 현대성을 갖춘 시인으로 고평했던 시인입니다. 둘은 1921년 생으로 친구이기도 하고 <후반기>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둘은 전쟁기에 새로운 시를 도모했던 무리에 속했던 사람들이지요. 김수영은 박태진의 시가 ‘생활과 육체 속에 진정한 현대성을 자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탓인지 박태진은 난해한 시를 쓰는 사람으로 치부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시 「나는 한국사람」은 전통 서정과 한참 먼 것 같습니다. 잘 다듬어진 시어도, 아름다운 묘사도, 낯익은 수사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저 이야기하듯 독백하는 느낌입니다. 1990년 출간된 시집 『다 어데갔는가』에 실렸는데 초기 시에 비해 그렇게 이해 불가한 것은 아니네요. 그런데 한편 쉽게 이해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체 ‘한국 사람’은 어떤 정체성을 지닌 건가요. 한국 땅에서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면 한국 사람 아닌가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한국인임을 뼈저리게 배웠”다는 말을 되뇌어 봅니다. 그는 어째서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배워야 한다고 말하나요. 김수영은 현대식 교량은 ‘죄 많은 다리’이며 건널 때마다 ‘부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오늘 우리를 만든 역사이기에 박태진도 ‘뼈저리게’ 혹은 ‘심각하게’ 지난날을 회상하자는 겁니다. 박태진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모국어였던 일본말을 서둘러 버리고 불어를 익혔고 영어에 능통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바꾼다고 해서 한국 사람이 새로운 무엇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럴수록 옛것은 무슨 영화처럼 여겨지고 추억처럼 떠올려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오로지 간직할 것은 ‘여기 씨뿌리는 낱말 몇줌’이란 자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김수영과 박태진이 지향했던 현대성은 지난 역사의 ‘뼈저린’ 깨달음에서 발현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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