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에는 책 정보를 알아보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다. 파고드는 성향 탓에 가격 비교는 물론 후기까지 읽고 또 읽었다. 넘쳐나는 정보와 배송된 책더미 속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여기에 책 때문에 드는 비교, 설렘, 욕심, 집착, 실망 등 감정의 무게까지 더해졌다.
새 책을 찾던 눈을 점차 물려받은 헌책으로 돌리게 되었다. 책을 고르는 시간은 줄고,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늘자 어떤 책을 어떻게 선정할 것인가, 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우리 집에는 헌책이 많다. 아이 책의 90퍼센트는 헌책일 것이다. 물려받고 얻어온 책들인데, 누군가의 눈과 손을 거쳐 이렇게 만난 것 또한 인연이라는 기쁜 마음으로 그 책들을 맞이했다. 오래된 것들은 왜 그리도 내 마음을 끄는 건지.
나는 헌책의 노릇노릇 바랜 종이와 수수한 색감, 빵 굽는 듯한 냄새를 좋아한다. 반면 새 책은 대하기 어렵다. 푸르도록 새하얀 종이, 쨍한 그래픽, 아릿한 잉크 냄새는 신경을 자극한다. 내게도 이러한데, 아이에겐 모든 게 과한 자극이 될 것만 같다.
같은 책이라도 신판보다는 구판이, ‘쩍’ 소리 나는 새 책보다 놀놀하게 손 탄 책이 더 좋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영광의 흔적이다. 페이지마다 사랑받은 것 특유의 따스한 정서가 배어난다. 버려지지 않고 우리에게 와준 게 고마울 정도다.
어쩌면 그 마음이 검색 품을 줄인 일등공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명한 책이 아니어도, 최신 정보가 없어도 ‘인연이다’ 여기고 보여주면 마음이 편했다. 내게 너무 많은 경우의 수는 고통이다. 물려받는 책의 강제적 심플함이 좋아져서 새 책에 대한 검색과 동경을 곧 거둬들였다.
물려받은 책들은 이야기 배경이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투도 그림체도 다소 촌스럽지만, 순한 그림과 맑은 감수성이 사랑스럽다. ‘아이 책’이라는 기본에 충실한 책들이다. 그 안엔 폴더폰과 필름 카메라, 동네슈퍼가 있다. 내겐 익숙한 과거지만 아이는 본 적도 없는 선사 적 유물들. 특히 옛날 자동차가 아이의 관심을 끌었다. 요즘 차와 비교하는 재미가 있나 보다. 나는 나대로 필름 카메라에 빛이 들어가 사진을 못 쓰게 된 이야기,
딸깍대던 폴더폰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아이와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은 기분을 즐기곤 한다.
당장 딱 맞는 책이 아니라도 어떻게, 어떤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아이에게 맞는 좋은 책이 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아이가 다섯 살 때 초등용 역사 전집을 물려받았다. 아이가 어리고 한창 과학에 빠져 있던 때라 상자째 장롱행이었다. 몇 달 잊고 지내다 이사 통에 그 책들을 꺼내 보았는데, ‘어렵중에 네 취향 하나쯤은 있겠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취향이 있으면 비취향도 있는 법. 아이가 외면하는 책은 읽히지 않았다. 사실, 좋아하는 책만 골라보는 아이는 구박이 아닌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자기 취향과 주관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니까.
헌책들은 그렇게 우리 집에 온 후 말 그대로 ‘헌책’이 되어버렸다. 해묵은 책이라 안 보지 않을까, 하는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가 좋아했다. 해를 거듭하며 책 기둥이 흔들리다 못해 제본이 분리된 책들도 여럿. 나는 그 책들을 책육아의 훈장으로 삼는다. 번쩍이는 최신간이나, 열띤 독후 활동의 흔적보다 더 멋지고 애틋한 우리만의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