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물욕이 거의 없어요. 딱 두 가지에만 욕심이 있습니다. 책이랑 사람 욕심이요."
전찬일 영화평론가가 시그니처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젊은 세대나 영화와 거리가 있던 이들이 그를 처음 본 건 팟캐스트 '매불쇼-시네마 지옥 코너'를 통해서가 아니었을까. 한국영화의 발전을 지켜봐 온 이 중견 평론가는, '뉴 미디어'라는 새로운 세계의 구독자들과 젊은 논객 사이에서 기죽는 법이 없다. 댓글 표현을 빌리자면, '샌님'처럼 점잖게 앉아있지만 할 말은 다 한다. 그렇다고 억지로 무게 잡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사려깊은 태도로 영화를 바라본다. 2020년 2월, 단발성으로 나왔던 매불쇼에 그가 5년째 함께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매불쇼'는 현재 유튜브 구독자 178만을 넘겼다)
그런 그가 기자의 눈에 들어온 '한 컷'은 또 있었다.
같은 방송에서 영화 '나폴레옹'을 소개할 당시 전 평론가의 책상 위에는 나폴레옹에 관한 소설이 놓여있었다. 촬영 현장까지 책을 가져오다니. 스크린 사이로 진한 독서인의 향이 풍겨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최근 학술지에 김훈의 소설을 비평했고, 책과 역사를 잇는 대중강연을 하고 있었다.
1993년을 시작으로 젊은 세대와 유쾌하게 소통하며 장르를 오가는 이 사람이 궁금했다. 소탈한 티에 운동화, 백팩 차림으로 나타난 그를 만나 '낡지 않는 올드스쿨'의 삶을 들었다.
매불쇼 출연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평론가의 외골수적 이미지와 다르다. 매체의 변화로 영화평론가가 지면보다 GV에 더 출연하는 시대지만, 그의 행보는 더 전방위적이고 사람을 향해 열려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오랫동안 지키며(2002~2007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 2009~2016 프로그래머, 마켓 부위원장, 영화연구소장) 한국영화계의 드라마틱한 성장기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헌신한 이유 때문일까?
"헌신이라는 말을 제 삶에 적용시키기에는 부끄럽긴 하지만, 다채로운 일을 한 건 맞아요. 애당초 어릴 때는 교수를 원했었고... 훗날 영화 평론을 하겠다, 이런 생각과 관계없이 영화 공부를 하게 된 건..."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 이야기가 쏟아졌다.
어두운 시대의 불빛, '영화'
전 평론가가 비평가로 정식 데뷔한 1993년 전후. 겉으로 보기에 그의 삶은 '주류 평론가'의 정석이었다. 일단,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나왔다. 게다가 정성일 등 걸출한 평론가와 영화인을 배출한 외부연합서클 '동서영화연구회' 출신이다. 예술계에도 어둠이 드리운 1980년대,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 등에서 본 검열되지 않은 영화들이 그의 삶을 바꿨다. "영화의 신세계에 빠져들었다"라며 그는 회상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영화를 봐왔어요. 그런데 대학 2학년의 어느 날,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는데 도저히 내용을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아, 영화도 공부를 해야 볼 수 있겠구나 깨달은 거죠. 그때부터 영화를 '스터디'했어요. 미친 듯이 보고 공부했어요."
하지만 그의 꿈은 본래 영화평론가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교수를 꿈꿔왔다. "그런데 대학원에ᅠ가자마자 깨달은 거죠. '교수 사회는 내가 꿈꾸던 세상과 다르구나.' 충격적이었어요."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그에게 '줄 서기'가 중요한 교수 사회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를 준비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더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 30분 정도 고민했어요. 안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결혼을 앞뒀을 때였을 거예요. 내 세상이 달라지고 있는데, 이제 할 게 없는 거예요."
프리랜서, 그 생존투쟁의 현장
'분산형 전문가'의 탄생
글 잘 쓰고 영화와 책 좋아하는 그가 할 수 있던 게 있었다. 바로 기자와 평론가였다. "평론가는 프리랜서입니다. 생계가 막막하죠. 그러다 보니 지금껏 다양한 일과 병행하며 폭넓게 일해온 겁니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해왔지만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 삶을 살기도 했고요…"
이후에도 언급하겠지만, 그에게 가장 영향을 준 책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다.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처음 번역된 이 책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두 인물을 통해 지성과 육체, '정주'와 '방랑'의 삶을 대비해 풀어낸다. 아카데미라는 전통적인 '지'의 세계를 나온 그의 본격적인 '방랑'이 시작된 건 이즈음이었다.
대학원을 나와 생계를 위해 1989년 주간지 기자로 입사해 영화/연극계를 2년간 취재했고, 개인으로서 계속 영화 글을 썼다. 하지만 기자 사회에도 그는 뿌리내릴 수 없었다. "영화 시사회를 다녀와서 보도 자료를 펼치는데, 거기서 (돈)봉투가 나오는 거예요. 촌지죠. 기자 생활을 계속하는데 이걸 안 받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다른 깨끗한 기자들에게는(이런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그랬어요."
그러나 기자 생활과 '방랑'이 준 선물도 있었다. 사람이다. 특히 당시 다른 언론사 기자였던 임진모 음악평론가와의 인연은 그를 생각지 못한 세계로 이끌었다. "어느 날 (임)진모 형한테 전화가 왔어요. 찬일 씨, 우리 음반 기획 해볼래?" 그렇게 주간지를 나와 4년 간 음반기획사에 몸을 담는데, 그 사이 탄생한 게 바로 그룹 인공위성이었다. 1990년대 초반 유명 CF까지 꿰찬 아카펠라 그룹. "똥차 운전까지 직접 하면서 매니지먼트를 다 했죠. 직접 음악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학교에 가서 발탁했고요.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당시 인공위성이 방송에 출연하면 500만 원 정도 받았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엄청난 거죠."
이때에도 영화 글쓰기는 계속됐다. 그가 비평가로 정식 데뷔한 건 1993년 11월, 당대 지식인들이 거쳐 간 월간지 '말'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비터문'(Bitter Moon, 1992) 비평을 기고하면서였다. 1993년은 인공위성이 데뷔한 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음반 기획 일을 멈췄나. 직접적으로 질문하지는 못했지만 전 평론가는 이런 말을 했다. "전 과도하게 돈을 추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던 것 같아요. 가끔은 그게 과할 정도로요. 안주하지 않는 삶이 제 가치관이기도 하고요." 두 아들을 둔 그는 이후 생계를 위해 한 주류회사에 취직했다. 평론가로서 글쓰기를 병행하면서였다.
"당시 저한테 영화사 차려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영화사 대표가 되면 (공정한) 평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거절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좀 후회됩니다, 하하. 충분히 좋게 활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1990년대~2000년대 초반까지 그가 평론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생존을 위한 노력, 그리고 "과도하게 돈을 추구하지 않는, 평론가로서 결벽에 가까운" 의식.
'오지랖'과 연결의 달인
다양한 일을 한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뭘까. 질문하자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일들이 쏟아졌다. 캐나다 출장에서 만난 영화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0)을 한국에 소개한 것도 그 중 하나다. 거장 드니 빌뇌브('듄', '컨택트')의 영화이지만, 당시에 그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었다. "영화 자체는 걸작이라 제가 아니어도 누군가 소개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상영 끝나고 영화가 너무 좋아서 호들갑을 엄청 떨었죠. 나중에 영화 관계자들과 연락하는데, 그때 제 모습을 보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부산국제영화제에 드니 빌뇌브가 직접 오기까지 한 건 제 영향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거예요, 하하."
외에도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연결해왔다. "제가 소개한 배우들이 캐스팅된 일들이 좀 있었죠. 외국 같으면 캐스팅 비용을 받았을 텐데요." 그가 웃었다.
독서는 아름다운 중독
마음껏 감탄하고 사람을 연결하는 능력은 다른 장르에서도 유효했다. 그는 2019년 책 『내 삶에 스며든 헤세』를 기획, 발간했다. 『데미안』 출간 100주년에 맞춰 58명의 필자들의 원고를 모은 책인데, 그 리스트가 놀랍다. 이해인 수녀, 박노해 시인, 김누리 교수, 이현우 인문학자, 조정래 감독... 평소 인연을 소중히 하는 그이기에 가능한 조합이었다.
그는 역사에 관한 관심도 매우 커, 최근 서거한 『베트남공산당 총비서 응우옌푸쫑』 열전을 총괄 기획했다. 지난 4월 출간된 이 책은 베트남에서 큰 존경을 받았던 베트남공산당 총비서(서기장) 응우옌푸쫑의 80년 생애를 담았다. 2014년 베트남에 처음 방문한 뒤 베트남과 한국 문화를 연결하려고 애써온 그가 친구인 저자와 베트남 현지 법인을 공동으로 꾸려온 후배들과 더불어 응우옌푸쫑에게 '매혹'되어 기획한 책이다.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응우옌푸쫑이기에 그에 관한 열전은 이제껏 없었다고(결국 이 책은 응우옌푸쫑 총비서 집권기에 그에 관해 출간한 유일한 책이 되었다)
"돈과 도박에 빠져 사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책에 빠져봤으면 좋겠어요. 독서는 아름다운 중독을 낳으니까요."
지와 사랑의 실천가
영화평론가인 그가 책에 매혹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세상이 돈으로 움직인다는 걸 자각한 중학교 시기"라고 했다. "전 궁핍한 삶을 살았어요. 초등학교 때 공부를 곧 잘했는데, 학교 임원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죠. 부모님이 촌지를 줄 수 없었으니까." 이후 예민한 중학생 시기, 고전에 매혹됐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을 시작으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싯다르타』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책들'이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헤세는 제가 지향하는 삶을 산 사람이더군요. 평생 안주하지 않았으니까요."
끝으로 그에게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어떤 말을 해도 꼰대로 들릴 텐데"라며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야 하는 것. 세 가지를 고려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두 아들한테도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10%는 공공성을 생각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포기하지만 않으면 새로운 일이 일어날 거라고."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나 역시 인생 초반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다"라면서 "하지만 지금은 공공성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첨언했다. "누가 볼 때 내 삶은 패잔병 같을지도 모르겠어요. 성공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번번이 다른 선택을 했고요. 물론 부산국제영화제에 있을 때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어요. 그런데 같은 연배에 비하면 큰 연봉이라고는 할 수 없죠. 힘든 일도 많았고, 아직 갚아야 할 빚도 적잖아요. 그런데 전 지금, 사는 게 정말 재미있어요. 앞으로는 우리 사회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렇게 할 겁니다."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