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보던 TV 드라마는 영화와 달랐다. 복장을 갖춰 입고 번화가 극장으로 가, 긴 시간 허리 세워 보지 않아도 됐다. 마늘을 까면서 흘깃 TV를 올려다보고, 저녁 반찬을 만들며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봐도 내용을 따라가고, 울고 웃었다. 이 시간이 쌓이며 중년 여성들은 드라마의 결말까지 척척 예측하곤 했고, 수많은 ‘국민 배우’들이 일일연속극에서 탄생했다. 사람은 배신해도, 매 시간 찾아오는 드라마는 배신하지 않으니까. 막장, 통속, 판타지는 아닌데 ‘판타지’ 같은 캔디형 주인공의 재벌 연애물 등등... 비현실적인 코드들이 ‘K드라마’의 클리셰가 됐지만, 이 역시도 현실의 고단함을 녹이려는 욕망에서 기원해왔다. 말하자면, 드라마는 서민의 삶과 함께해온 장르다.
‘안방극장’이 ‘스마트폰 극장’으로 옮겨간 지금도 드라마는 여전히 일상 가까이 있다. 판타지부터 스릴러, 추리물 등 비일상적 장르로 다양화되고, 작품성도 높아졌으며, 몰아서 ‘정주행’하는 시청 문화가 대세라고 해도 그렇다. 여전히 드라마는 고단한 하루와 한 주 끝,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맥주 한 캔 놓고 보기 좋은 장르다. 화제성의 빈부격차는 여느 때보다 크지만, 히트한 드라마는 사회생활에서 대화할 때에도 영향을 준다.
책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는 이러한 한국 드라마를 누구보다 성실하게 읽어온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의 ‘드라마 명대사 에세이집’이다. 드라마의 명대사가 촉발한 감정에서부터 자신의 일상을 서술한 에세이집으로, 에세이 앞에 한 페이지를 통으로 사용해 명대사를 제시한다. 이어서 저자의 일상 이야기가 겹쳐지며 오는 울림이 있다. 장인처럼 드라마 칼럼을 써온 저자이기에, 총 45 편의 드라마 명대사를 뽑은 솜씨도 남다르다. 판타지가 있든 없든, 시대극이든 현대극이든. 자신의 삶, 또 관계와 사회를 깊이 있게 반추할 수 있는 훅 들어오는 대사들이다.
““어디에 갇힌 건지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요.” 「나의 해방일지」에 나온 이 대사를 곱씹으며 진짜 행복은 뭘까를 생각해 본다.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라며 남 들 사는 대로 사는 것으로 불행하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우리는 그걸 행복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걸 우리는 애써 행복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편, 155쪽)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연의 순간들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나의 과거를 다시 마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대사 중)
책의 저자인 정덕현은, 줄거리를 단순 요약한 방송 기사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빛나는 글을 써온 이다. 애정을 기반으로 드라마를 감상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글을 썼다. “존잼. 노잼. 단 두 단어면 드라마가 평론되는 이때, 그의 글에 빚지지 않은 작가가 없다”라는 ‘대가’ 김은숙 작가(‘도깨비’, ‘더 글로리’)의 추천 평이 이를 잘 설명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저자가 오랜 시간 보고 또 봐온 ‘드라마’라는 세계를 닮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골똘하게 읽는 책이 아니다. 비상한 통찰력이 빽빽하게 이어지거나, 대단한 정보가 담기지 않으니 주의하라. 하지만 저녁 식사하며 보는 연속극 속 나를 닮은 타인의 삶처럼, 스윽 스윽 넘겨 읽어도 선명하게 읽힌다. 글 자체도 추상적인 언어에 기대기보다, 구체적으로 인물의 행색과 표정, 상황을 묘사한다. 그리고는 명대사를 렌즈로,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한 순간을 발견해 독자의 손에 쥐어준다. 어쩌면 이 책은, 저자가 드라마를 들여다보던 그 다정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바라본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책을 추천한 이들이 쟁쟁하다. 김은숙 외에도 박해영(‘나의 해방일지’), 이남규(‘눈이 부시게’), 임상춘(‘동백꽃 필 무렵’), 이우정(‘응답하라 1998’) 등 ‘국가대표’ 드라마 작가들이다. 이들이 이 책에 마음이 움직인 이유는, 물론 저자에게 받은 “글 빚” 때문도 있겠지만, 아마 일상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대한 동질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반복되는 평범한 삶 속에서 눈부신 순간을 짚어내려고 하는 바로 그 시선과 노력 말이다. 맘대로 풀리지 않는 일상 속에서, 드라마 속 대사들에 위로받았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슬슬 넘겨봐도 좋지 않을까.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