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느티나무 위에 금속분처럼 쏟아지는
하늘이 있었
고.
깨어진 석기와 더부러, 그
어느 옛 날
옛날이 있었
고.
금속분처럼 파아랗게 쏟아지는 햇 속에서 무고하게도
학살(虐殺)을 당한 것은 당신과 같은
흡사 당신과도 같은
포승 그대로의 주검이 있었
고
느티나무와 더부러, 그 어느 옛날이
있었
고.
지도자(指導者)가 있었
고.
깨어진 석기(石器), 석기 속에
말 없이 흘터진
이얘기와.
어느 조문(條文)과.
그 누구의 남루한 직함(職銜)과.
때 묻은 족보가 있
었
고.
꿈이 있었다.
몇 포기의 화초를 가꾸다가
느티나무와 더부러, 그 어느 옛날에
서 서.
세상을 버린 것은
금속분처럼 파아랗게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황소가 움
메……, 하고 울었기 때문이다.
- 전영경, 「선사시대(先史時代)」
먼지 구덩이와 진흙밭에서
우리는 윤동주나 김소월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시는 무언가 아름다운 언어로 채색된 것이라 여기고 있지요. 물론 이들도 뜬금없는 언어에 속박된 시인들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꽃을 보듯 생활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잊힌 시인이 많지만 그중 전영경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1960년대까지 부지런히 활동하다 사람들 눈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소위 순수시를 거부했습니다. 거친 말고 직정적인 목소리로 세상을 냉소했기 때문입니다. 이어령은 그를 두고 ‘먼지 구덩이와 진흙밭에서 뒹구는 쓰레기 시인’으로 평가 절하했으며, 유종호는 ‘원한과 자학과 냉시의 야시인’이라 맹비난했습니다.
시 「선사시대」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신동엽만 하더라도 분단과 전쟁으로 얼룩진 우리 역사를 극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했던 역시 이전의 원시 생명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전영경은 그조차 부정합니다. 역사 이전 선사시대에도 독재자가 지배하는 세계였으며, 주검 널린 학살이 있었고, 근대문명을 잉태한 금속 찌꺼기가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것은 현실 부조리에 저항하는 강력한 부정의 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전영경을 백석의 후예라고도 합니다. 현실을 받아 내는 서사 정신이 날카롭기 때문입니다. 다만 서정보다 분별심이 더 강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배제되거나 삭제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만큼 전영경은 독보적입니다. 시를 우습게 만들어 당대 비평가들의 분노를 샀으니 어느 정도는 시적 성취를 이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좀스럽게 시를 만지작거리며 세상 눈치를 보는 시인은 아니니까요. 백석이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한 뜻을 전영경도 시에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버린 것은/금속분처럼 파아랗게 쏟아지는/하늘을 향해 황소가 움/메……, 하고 울었기 때문이다.”라고. 누군가 그를 진창에 밀어 넣어도 그는 이미 산으로 갔습니다. 그의 시는 황소 울음같이 되새김질 후에 뱉은 중저음의 일성입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