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몇 개의 문장만으로도 큰 감동을 선사하고 알찬 정보를 제공합니다. ‘책 속 명문장’ 코너는 그러한 문장들을 위해 마련한 공간입니다. |
재필삼선, 즉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라는 말을 넘어 ‘무한 N수’가 보편화된 시대입니다. 대학 당국이 아무리 제도를 정비해보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재도전을 위해 떠나는 재학생들을 붙잡기엔 역부족입니다. <5쪽>
2024학년도 수능 응시자의 N수생(재수생 이상 응시자 및 검정고시 합격 후 응시자) 비율은 35.2%로 28년 만에 최고였습니다. 수능이 근 30년 된 시험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역대 최고’인 셈입니다. 2021년의 초, 중, 고 사교육비 총액은 23.4조원 규모, 2022년의 총액은 26조원 규모로 역대 최고 기록을 잇달아 경신했지요. 더 나아가 의대 정시 합격자 중 4수생 이상 비율은 2020학년도 9.2%에서 2022학년도 17.1%로 증가했고, 3수생 비율도 2022학년도 기준 24.8%를 기록했습니다. <5쪽>
수능시험의 공정성을 믿고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람일지라도 지금의 세태가 사회 전체의 비효율과 낭비로 귀결된다는 사실에는 동의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수능을 향한 비판이 거세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묘한 점은,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은 비판 여론에 냉소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6쪽>
결국 이런 형식의 시험에는 교육이 부재하거니와 능력 검증의 기능조차 없고, 어떤 면에서는 해롭기까지 합니다. <99쪽>
1) (3523.3/x)*327.4+552=2059.88일 때, x의 값을 계산기 없이 구하시오.
2) 흄은 미래에 대한 귀납 추론은 순환논증이므로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때 미래에 대한 귀납 추론에는 어떤 전제가 함축되어 있는지 추리하고, 그것이 순환논증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시오.
위의 두 문제는 까다롭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방식으로 까다로운 것은 아닙니다. 1번 문제는 초등학교 교과과정 내의 지식을 묻고 있지만, 그 형식상 수학과 교수라도 짜증을 느낄 만합니다. 반면 2번 문제는 학부 저학년 수준의 과학철학을 묻고 있지만, 해당 분야에 식견이 있다면 세 문장 내로 설명을 끝마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현행 수능은 어떤 갈래에 속할까요. 2장과 3장에서 거듭 살폈듯이, 전자입니다. <113쪽>
자석을 가져다 대면 자기장에 따라 철가루가 정렬되듯, 대치동의 영향력을 뼈대 삼아 전국 학원가가 재편된 셈입니다. <204쪽>
지방에는 정시를 대비시켜주는 학원도, 정시 노하우가 공유되는 지역 커뮤니티도, 수능 콘텐츠에 대한 인식도 없습니다. <215쪽>
학벌을 향한 집단적 선망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습니다. 충분한 학벌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 죽고 말 것이라는, 생존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 감각은 2020년대의 현실이거니와 한국의 근현대사에 뿌리내린 것이기도 합니다. <460쪽>
한국은 분명히 공포와 불안의 힘을 통해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그 동력의 내적 모순이 한국을 붕괴시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0.7명대로 떨어진 합계출생률과 40%에 가까워지는 수능 응시 N수생 비율이, 역대 최고를 기록한 사교육비 규모가 대표적인 증거겠지요. 어떤 목적을 위해 누구를 가르치는지, 가르침의 방식은 어떠해야 할지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세울 때입니다. <496쪽>
『수능 해킹』
문호진, 단요 지음 | 창비 펴냄 | 504쪽 | 2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