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차라리 절망을 배워 바위 앞에 섰습니다.
무수한 주름살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세월이 아픈가 또 하나 금이 갑니다.
- 이호우, 「금」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보자고
가람 선생 이후 시조는 다시 목숨을 트인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일상을 드러내기 위해 애쓴 흔적이 현대 시조에 남아 있습니다. 그중 이호우는 단연 걸출합니다. 시조가 옛 장르라서 외면받고 있지만 오늘날 시조는 자유시보다 더 명징하게 현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명맥을 잇게 해 준 장본인입니다. 음풍농월에서 벗어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소리를 듣고자 귀 기울였으니까요. 이호우는 육사와 더불어 영남 지역 선비 정신을 삶과 시에 그대로 녹아냈습니다. 해방 이후 부조리와 불공정한 현실과 간단없이 맞섰습니다. 그때마다 역대 독재 정권은 그를 필화 사건으로 엮어 고초를 겪게 했습니다.
시 「금」은 1955년 『이호우시조집』에는 「균열」이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후에 동생인 이영도와 공동 시집을 묶으며 이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우리말 제목이 더 아픕니다. ‘차라리’라는 말을 쓸 데는 더 나은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시인의 마음이 더 절실합니다. 이 당시 「바람벌」이라는 시 때문에 반공법에 걸려 치도곤을 당할 때입니다. 이승만을 향해 용비어천가가 난무할 때입니다. 하물며 ‘서울’을 이승만의 호인 ‘우남’으로 바꾸자 주장하는 모리배들이 날뛰던 시절입니다. 희망이 없으니 ‘차라리 절망’을 배우겠다는 현실이 더 핍진하게 다가섭니다.
이호우는 박정희 쿠데타 이후에도 절망을 삶의 뿌리로 삼았습니다. 월남전 파병을 풍자하는 시 「삼불야(三佛也)」를 쓰기도 하고 미국 핵실험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서정을 잃지 않는 시의 구경은 놀랍습니다. ‘차라리 절망’을 배운 뜻이 ‘오히려’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바탕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시 「바람벌」 1연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꽃같이 살아보자고 아아 살아보자고.” 그래야겠습니다. 아직도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차라리’.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