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시인의 얼굴] 한 사람이 앞장서 가고 있었다: 구자운, 「벌거숭이 바다」
[시민 시인의 얼굴] 한 사람이 앞장서 가고 있었다: 구자운, 「벌거숭이 바다」
  • 이민호 시인
  • 승인 2024.06.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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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비가 생선 비늘처럼 얼룩진다

벌거숭이 바다

괴로운 이의 어둠 희락의 구름

물결을 밀어 보내는 침묵의 배

슬픔을 생각키 위해 닫힌 눈 하늘 속에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바다, 불운으로 쉴 새 없이 설레는 힘센 바다

거역하면서 싸우는 이와 더불어 팔을 낀다

여럿으로부터 떨어져 섬은 멈춰 선다.

말없는 입을 숱한 눈들이 에워싼다.

술에 흐리멍텅한 안개와 같은 물방울 사이

죽은 이의 기 언저리 산 사람의 뉘우침 한복판에서

뒤안 깊이 메아리치는 노래 아름다운 렌즈

헌 옷을 벗어버린 벌거숭이 바다

-구자운, 「벌거숭이 바다」

한 사람이 앞장서 가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앞장서 가고 있었다”라는 표현은 김종삼 시 「샹뼁」 중 구절입니다. 그다음에는 “언어에 지장을 일으키는/난쟁이 화가 로트렉끄씨가/화를 내고 있었다.”고 이어 끝을 냅니다. 프랑스 화가 로트레크의 인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려서 다리를 다쳐 평생 절룩이며 살았던 로트레크처럼 구자운도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게 됩니다. 그러므로 화가와 시인은 이 세상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몸 깊이 화를 키우며 살았을 겁니다. 그 속내를 어찌 쉽게 알 수 있을까요.

「벌거숭이 바다」는 구자운이 1964년 부산 국제신보와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다 사임하고 서울 옥인동으로 돌아와 발표한 시입니다. 5.16쿠데타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논설을 펼치다 강압으로 쫓기듯 귀경했던 무렵입니다. 그러니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한데 엉켜 아수라장이 된 비극적 역사의 현장에서 그는 신동엽처럼 중립지대를 꿈꾸었습니다. 바다는 괴로움도, 슬픔도, 불운도 모두 끌어안고 한 개 섬이 되자고 메아리쳐 소리치고 있습니다. 육지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따로 또 같이 ‘더불어 팔을’ 끼고 있으니 부르는 노래 아름답습니다. 시인은 ‘헌 옷을 벗어버린 벌거숭이 바다’입니다.

앞장서 가는 사람은 전위입니다. 그를 따르는 우리는 후위입니다. 앞장서 가는 사람이 빠르지는 않지만, 휘청이며 가고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할 곳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구자운이 미당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다고 해서 후위에 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를 ‘청자수병’ 속 ‘학’처럼 가두어 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장-자크 샹뺑(Jean-Jacques Champin, 1796~1860)은 역사적 풍경 이면에 시민의 얼굴을 새겨 놓았습니다. 로트레크의 〈물랭 루즈〉 포스터 그림을 기억하나요. 석판화 속에는 물랭 루즈 무용수나 성 판매 노동자 등 파리 하층계급 여성이 부각돼 있습니다. 그리고 구자운의 벌거숭이 바닷속에 팔을 끼고 섬이 되었습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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