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독서를 ‘만병통치약’처럼 얘기하지만, 독서가 독이 될 때가 있다. 자신의 기존 생각이 맞음만을 확인하기 위해 우악스럽게 책을 읽거나, 지적인 우월성으로 타인을 누르는데 책을 사용하는 경우다. 어느 시절 이런 경향성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흘러도 이렇게만 책을 읽는다면 그는 ‘꼰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만 권의 책을 읽었어도 자기 생각만 복제한 채 타인을 판단하는 ‘지식인’들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이와 반대로, 책 한 권을 읽어도 꼭꼭 씹어서 자기 언어로 만들고, 삶과 타인을 이해하고자 독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책에서 얻은 언어를 매개로 끊임없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성찰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을 구분하고, 독서와 삶을 통해 벼려온 자신의 언어를 타인과 나눈다.
‘어록의 황제’, 윤여정의 독서 여정
배우 윤여정은 바로 후자의 독서인이 아닐까. 연기뿐 아니라 다양한 어록으로 젊은 세대에게 사랑받아온 그 윤여정 말이다. 팬이라면 알다시피, 그의 취미는 독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취미고 이불 밑에서 영화와 책을 즐기는 것(2024년 유튜브 '공부왕찐천재 홍진경')을 좋아한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과거 한 기사에서는 작가 이문구와 박완서, 최인호, 김훈과 김영하 등 한국의 굵직한 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당신의 리스트] '소설애호가' 탤런트 윤여정, 내가 탐닉하는 책 5’, 조선일보, 2016.01) 지난 1월 유튜브 콘텐츠 ‘나영석의 나불나불’에서는 최근에는 본래 잘 읽지 않았던 시집을 읽고 있다고 수줍게 고백했고, 지난 5월 공개된 한 인터뷰에서도 문학이 항상 마음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그는 설명했다.(‘윤여정은 이렇게나 윤여정이다’ 인터뷰, 엘르, 2024.05/이하 엘르 인터뷰)
이렇듯 그는 문학애호가라고 부르기에 무리가 없다. 실제로 20대 때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연기를 시작하며 중퇴했다. 시간을 더 거슬러, 국민 학교 때도 그는 언어에 민감한 어린이였던 듯하다. 1959년, 윤여정이 6학년 때 수필 상을 탄 원고가 공개되며 화제를 모았었는데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집에는 부엌이 없다”라고(1959년 10월 7일 제삼(三)전국 아동예술대회 문예부 특선). 짧고, 단순한 첫 문장 하나로도 화자의 녹록하지 않은 삶의 조건과 환경이 선연히 드러난다. 어린이들이 경직되기 쉬운 ‘수필 대회’에서 어른의 문장을 흉내 내지 않고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점도 인상적이다.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지만 다 아프고 아쉬워.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해. 난 웃고 살기로 했어.” (2013년 tvN ‘꽃보다 누나’ 중)
“난 우아하진 않아요. 그건 오해입니다. 멋있다는 게 나쁜 말은 아니니까 듣고 있지만 정말 먹고살기 위해 일했고, 끔찍하게 아파하고 투쟁하며 살았어요. 나는 열심히 산 사람일 뿐이에요.” (2024년 엘르 인터뷰 중)
그래서인지 윤여정의 말이 어느 시점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 꾸준히 회자되고, 울림을 주는 현상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의 문장은 짧게 내리 꽂힌다. 거창한 단어나, 사탕발림은 없다. 그냥, 삶의 진실을 느낀 그대로 말한다. 그가 연기한 많은 인물들처럼, 삶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지만 꼿꼿하게 고개를 든다. 2021년 영화 ‘미나리’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지금의 언어는 더욱 담백하게 와닿는다.
말이 삶 보다 앞서지 않는 사람
하지만 윤여정의 말이 주목받아온 이유는, 당연히 언어 때문만이 아니라 그 삶 자체에 있다. 1966년 데뷔해 KBS ‘장희빈’(1971)으로 스타덤에 오른 그의 삶은 일견 화려해보이지만, 그 시절을 살아온 평범한 여성들의 삶과 겹쳐진다. 스타였지만 결혼과 함께 돌연 TV에서 사라졌고, 미국으로 가 배우가 아닌 주부로 많은 시간을 살았다. 이후 생계를 위해 단역부터 다시 시작했다. 보수적인 시대상황 속에 ‘이혼’한 여성 배우에 대한 시선을 감수하는 건 덤이었다. 굴곡 있는 그의 삶을 두고 스스로 “내 삶이 전위 예술”(‘나영석의 나불나불’ 중)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화려한 재복귀. 이런 떠들썩한 말은 싫어요. 주부로만 묻혀있어 모두들 잊었으려니 했는데 이렇게 기억해주시니 감사할 뿐이죠.” (1984년 경향신문 인터뷰 중)
또다시 치열한 시간이 흐르고 윤여정은 ‘배우들의 배우’가 됐다. 이후에 그는 예산의 크기를 떠나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젊은 영화인들을 지원해왔다. 배우로서의 도전도 지치지 않고 계속됐다. 한국 안에서 ‘대배우’였던 그는 영화 ‘미나리’로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세계인 앞에 나섰다. 그렇게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품에 안았고 최근에는 LA에서 특별 회고전을 가졌다. 오는 8월 시즌2로 돌아오는 애플TV+ ‘파친코’ 시리즈에서는 한국 근현대사의 곡절을 지나온 재일동포 ‘선자’를 그려냈다.
꼰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젊은 세대가 듣기 좋은 말을 찾아서 하고, 젊은 세대와 가까운 척하는 게 아니다. 윤여정도 ‘어른 말 좀 들어라’, ‘여러분들도 나이 든 사람들한테 너무 뭐라고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정말 다른 세상을 살았답니다’(2024년 엘르 인터뷰 중)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젊은 세대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타인과 다른 자신의 위치를 알고, 말이 삶을 초과하도록 부풀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이 아니더라도, 타인과 자신을 바라보고 읽어야 하는 게 아닐까. 수많은 대본 속 인물들과 책, 그리고 사람과 세상을 치열하게 ‘독서’해온 윤여정처럼.
[독서신문 유청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