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우리가 사랑했던 시인들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시민이라 여기면 얼마나 친근할까요. 신비스럽고 영웅 같은 존재였던 옛 시인들을 시민으로서 불러내 이들의 시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국민시인’, ‘민족시인’ 같은 거창한 별칭을 떼고 시인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졌던 시도 불쑥 마음에 와닿을 것입니다. |
괴로운 나날이었다
아내 손은
우리 역사와 같이 망가지고
입술을 다물었다
찾아오는 손님
가는 나그네
뜨거운 소주를 마시고
눈물을 글썽이며 가버렸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 사람
한잔의 술도 나누지 못하고
가버린 그 사람
그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며
나는 술을 들었다
고통은 커다란 기쁨
언제고 간에 만나야 할 사람
겨울이면 나는 울었다
쫓겨가며
간절한 사연도 토하지 못하고
간 그 사람을…
-박봉우, 「겨울 포장집의 아내」
피비린내 나게 싸웠던 나비 한 마리
곧 한국전쟁 날입니다. 무엇이라 부르든 전쟁은 가장 큰 폭력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이 더러운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박봉우가 떠오릅니다. 그를 두고 천상병과 김관식 등과 더불어 기인이라 부릅니다. 천상병이, 김관식이 본래 시인의 반열에서 추방당한 존재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길 좋아합니다. 박봉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정신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그를 시인이 아니라 손가락질해도 세상은 두 눈 멀쩡히 뜨고 아름다운 말만 하는 인공지능 같은 시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 「휴전선」과 「나비와 철조망」 속에서 그는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동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요런 자세로’ 살아갈 때 그의 시 한구석에서 또 다른 분단 현실을 건져 올립니다. 시 「겨울 포장집의 아내」는 서울살이를 끝내고 전주로 내려와 생을 마감했던 그의 아내를 기리고 있습니다. 남편을 대신해 그의 아내는 포장마차를 하며 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렇게 최후까지 날갯짓하다 스러졌습니다. 김종삼이 ‘드빗시 산장 부근’에서 ‘한 푼어치도 팔리지 않는 구멍가게’를 열었듯이 그들도 ‘장사를 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이 어떻게 커다란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시인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입니다. 우리가 비록 전쟁 중이지만 언젠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아내는 생활이라는 전쟁 통에서 암으로 세상을 등집니다. 그래도 고통 속에서 기쁨이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 역사를 같이했기 때문입니다.
박봉우는 정신 병동에서 이 세상과 결별합니다. 기개에 찼던 그가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던 것은 한편 당연하지 않을까요. 분단과 전쟁과 혁명을 거치며 어떻게 맨정신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나비와 같이 여린 시심을 품은 시인은 그럴 수 없었나 봅니다. 생활의 철조망을 뚫고자 몸부림치다 피 흘렸던 아내와 더불어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요런 자세로’는 살아서 안 된다고 속삭입니다. 우리 문학의 몸속에 그와 지냈던 날들이 패어 있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지독한 사랑’일 겁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휴전선 철조망을 걷고 그와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작가 소개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그 섬』이 있다.